[묵상글]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전봉석 2018. 3. 7. 07:36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태복음 10:19-20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시편 93:3-4

 

 

 

기어이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그러한 순간이 은혜다. 많은 이는 이 은혜로 말미암아 죽이려 하지만 은혜가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나는 세 편의 짤막한 이야기가 한데 붙여진 누가복음 8장 26-56절의 내용을 보다 의구심이 들었다. 서로 연관성이 전혀 없는 각각의 이야기가 한데 붙은 것으로 공통된 주제는 은혜였다.

 

앞서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군대’라 하는 귀신이 들린 한 자를 만나셨다. 저의 일은 오래된 것이다.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26-27).”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지쳐 있던 때이다. 본인도 어쩔 수 없어하던 일이다. 군대라 하면 6천 명 정도의 규모를 뜻하는, 그야말로 하나가 아닌 것으로 스스로도 주변 누구의 도움으로도 어찌 감당이 안 되는 터였다. 저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저는 이를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다.

 

다음은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41).” 딸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 가시는 길에 많은 인파가 몰렸고 그러는 중에 예수님과 당사자만이 아는 신비한 일이 벌어졌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43-44).” 오죽하니 베드로가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예수에게 손을 대는데 예수님의 물음에 의아해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45).”

 

그러는 와중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49).” 이 세 이야기는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 같지만 아주 ‘특별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더는 어쩔 수 없다는 고통과 어려움으로 생의 최전방에 몰려 있던 것이다. 군대라 하는 귀신이 들려 있던 이도 그렇고, 12년이나 피를 쏟는 여인의 피폐한 삶도 그렇고, 끝내 죽어버린 야이로의 딸도 그렇고.

 

더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의 이야기 세 편이다.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도 통제를 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러니 더는 희망이 없다. 그저 하나님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의 발아래 엎드리는 수밖에. 다만 저의 옷자락이나마 만질 수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에 내몰린 생이었다. 다 끝난 것 같은 이야기.

 

두 아이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한 아이가 잔뜩 우울한 목소리로 칭얼거리듯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기저기 이력서는 내보지만 딱히 마땅한 일자리는 없고(자신이 원하는) 그러니 집에 있기는 뭐해서 동거하는 남자아이의 집에 기거하며 무료한 날을 보내고 있던 것이다. 왜 그러고 있나. 당장 나와라. 뜬구름 잡듯 어떤 완성된 무엇을 잡으려하지 말고 그 주변 것들로 시작해라. 몸도 마음도 왜 그리 함부로 굴리나. 뭐라 야단을 치기도 하고, 다독이기도 하다 나나 저 아이나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데서 벽을 느꼈다.

 

아이와 통화 중에 어찌 지내는가, 궁금하였던 아이에게 이번에는 내가 전화를 넣었다. 마침 자취방에서 혼자 뒹굴다 전화를 받는 것이라며, 녀석도 그저 심드렁하니 살고 싶지 않다는 목소리로 근황을 말해주었다. 방학동안 거친 알바를 해서 돈도 좀 벌었을 텐데 어디다 다 쓰고는 ‘아버지가 약값도 안 준다.’는 이유로 신경정신과도 못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 상태는 점점 더 우울해져 수업이 있을 때만 간신히 학교에 가고 거의 대부분 자취방에 틀어박혀 있다고 하였다. 한 번 들르려 했는데 지하철을 못 탄다나?

 

그 정도를 가늠할 수는 없다. 고통과 어려움은 절대 주관적인 것이어서 누가 보기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본인들에겐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저 정신 상태가 썩어빠져서 그런 게 아니다. 안일하고 무책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뭐라 나무라기는 했지만 아이들도 스스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군대 귀신이 들린 걸 어쩌겠나? 12년째 피를 계속 흘리니 어쩌겠나? 저는 부정하다 하여 모든 의식에서도 배제되는 인물로 살아야 했다(레 15:25-30). 기어이 야이로의 딸은 죽었다!

 

하나님만이 살 길이다. 다른 대안이 없다. 나는 그 사실을 말해주고 싶은데 아이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뭐라 하면 마치 그러는 하나님이 그럼 왜 날 이렇게 두느냐는 식으로 따진다. 마치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삿대질을 해댄다. 그래서 외조카아이는 기어이 잘 다니던 교회도 아예 끊었다고 말하였다. 은혜를 마치 하나님의 의무로 아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시지 않냐? 그럼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하나님의 은혜는 무궁하며 무한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쓰임과 한계에 제한을 두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지경인데, 우리 사회가 지금 이 모양인데, 이 민족이 이처럼 위급한데… 하는 식으로 지청구를 늘어놓지만 실은 그만큼, 그러니,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 병을 낫게 하고, 살리시고, 좋은 결말로 이끌어야 은혜인가? ‘좋은 결말’이라 할 때 우리가 흔히 바라고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을 예상하는 게 아닌가!

 

은혜는 극과 극이어서 누구는 죽이려 들고 누구는 이내 살아서 삶을 찬양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이것으로 구원을 이루신다. 이로써 세상을 이기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당하나 당할 수밖에 없으나, 담대하라. 이미 이긴 세상이다. 나는 아이들로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주의 이름을 불렀다. 뭐라 한들 들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최소한 이주에 한 번 정도씩은 살아있는가, 안부를 전하라고 일렀다.

 

오늘 본문은 이러할 때 내가 무엇으로 무장을 할 수 있는지 일깨우신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 어쩌다 우연처럼 아이 둘과 긴 통화를 해야 할 때, 뭐라 할 말이 없어 쩔쩔매다가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말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똑같이 그러던 이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 이야기가 들려질 거라 짐작하였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더더욱 우연처럼 한 본문을 읽게 하시고, 그 세 이야기를 통해 더는 어쩔 수 없음에 대해 묵상하게 하시고. 그것으로 끝장난 이야기에서 예수를 만나는 국면으로 새로 전환되는 것을 알게 하셨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나 역시 절망하고 좌절하기 일쑤지만 그럴 때마다 주께서 어찌 인도하시는가를 나는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사람이었다.

 

아침마다 건너와 차를 한 잔 대접하는 이가 어제는 구구절절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 역경의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나는 저의 굽이굽이마다 얽혀 있을 숱한 사연과 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짐작하였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이 ‘오늘 여기’ 내 앞에서 저의 이야기를 이어지게 하신 것이니까.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시 93:3-4).”

 

아무리 생의 여파가 파란만장하다 해도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어찌 헤아려 알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은혜이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왜 오늘 여기에 두시는지 말해주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나는 주를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구구절절 이어지는 저의 인생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들의 난감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이루어 가고 계시는 이야기를 읽는다. 사복음서를 읽다보면 이내 우리들로 하여금 부활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그리하여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고, 그래서 나는 이제 내가 듣는 것을 아이들에게 삶으로 보여줄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한다. 나에게 보이는 이 놀라운 은혜를 아이들에게, 저이에게 들려줄 수 있기를 위해 소망한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나는 이제 저들의 평안을 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 10:12-13).” 그렇지만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14).” 더는 미련을 두지 않는 데도 신중을 기한다. 이에 공연한 감상에 젖어들지 않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므로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것도 은혜라.

 

저가 비록 군대라 하는 귀신에 들려 오랫동안 어쩔 수 없는 지경이었겠으나, 12년을 혈루증 앓으며 살았을 터이지만, 기어이 딸애가 죽었지만, 저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곧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27).” 그래서 고난과 역경은 주의 마음에 나를 묶어두는 은혜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구구한 인생살이가 그저 그 이야기로 끝나지 않음을 나는 저 노인에게 말해주고 싶다. 정녕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따로 있었으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28).” 가난도 질병도 어떤 고난과 역경도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의 우울함도, 함부로 굴려대는 몸과 마음도, 실은 그것이 주를 만나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도는 여정이었다 해도 결국 우리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0-31).”

 

그러므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 곧 주가 다스리심을.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시 93:1).” 나는 주 앞에 앉아 더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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