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태복음 12:20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편 95:1-2
한 아이가 슬그머니 울었다. 왜 우니? 가슴이 답답해서요. 속이 안 좋니? 그런 게 아니라, 숨을 쉬기가 어려워요. 왜? 모르겠어요. 유난히 겁이 많은 아이였다. 아내가 말을 하는 동안 나는 아이를 떠올리며,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종종 위경련이 올 정도로 예민하고 여린 아이였다. 헤어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집에 있는 아저씨를 좋아할수록 죄책감이 든다. 아저씨는 용돈도 잘 주고 친절하며 백만 원이 넘는 컴퓨터도 사주셨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무섭고 괴롭다고 하였다.
모처럼 긴 면담 후 의사는, 그 정도면 심각하셨던 거네요. 그게 어디 일상을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다고 하겠어요? 아무 데도 못 가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오래 된 거네요? 왜 진작 몰랐을까? 거참. 불안장애입니다. 것도 아주 심한! 의사의 단호한 말에 나는 의아하였다. 안정제와 별도로 보름치 치료약을 처방하였다. 예의주시하고 어떤 변화가 있는지 말해야 한다고 일렀다. 나는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 저 혼자 뭐라 하는가, 싶어 심드렁하였다.
공교롭게도 오전에 병원에 들렀다 온 것인데, 아내는 점심을 먹으며 아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요일마다 무리지어 또래 아이들과 글방에 오는 아이였다. 살짝 물어보고 아이가 싫지 않다면 하루를 더 내어보자고 하였다.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거기에 맞는 성경공부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글방으로 가다 풋, 하고 웃음이 났다. 정작 치료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인 내가 아이를 염려하는 것이 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늘 의외다. 오후께 주인 사장이 건너왔다. 요즘은 아버님이 아침마다 출근하듯 들러 차를 한 잔씩 하는 바람에 모처럼 마주앉은 거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실은, 하고 저는 입을 열었다. 모 정수기 대리점이 7층에 있다 우리 층으로 올까 하는데, 자기네 큰 방과 함께 이쪽도 같이 붙여서 세를 얻었으면 한다는 거였다. 교육실이 필요한데 옆에 빈 사무실은 어쨌든 떨어져 있으니까 우리 쪽은 문만 내면 되는 것이어서.
어렵게 말을 꺼내는 걸 나는 그냥 그러자고 하였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우리에겐 과분한 것이어서 아무래도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 되면 사장은 다른 데 1층으로 세를 얻어 나가야 하는 것이어서 나더러는 좀 더 오래오래 있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야 뭐, 내가 하는 일이 아니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없어서 그냥 풋, 하고 웃었다. 와서 글짓기를 하고 있는 아들애의 근황을 묻고 사춘기인 것 같다며 또한 여러 당부를 하였다. 나는 가만 있는데 저가 교회를 신경 쓰는 것이니 것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중학교 아이 둘과 수업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났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 의외다. 의사는 나더러 불안장애가 중증이라는데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렇듯 말하는 일상의 불편함이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는 데 더욱 유용한 것이 되어서 말이다.
안 그러면 내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할까? 우린 늘 기도하기를 ‘그런 아이들만’ 붙여주셨으니 주께서 하셔야 한다고 빈다. 공부를 못해도 그냥 못하는 게 아니라 아주 지진아 수준의 아이와 집안이 어떠네 하는데 들춰보면 아주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방임과 폭압에 시달리는 경우여서. 가난한 정도가 아이 몰래 아이엄마가 노래방도우미로 나가야 할 처지이니. 말 그대로 어쩜 꼭 그런 애들만 붙여주시는지! 나름 우리의 논리는 이를 ‘틈새시장’이라 부른다. 다른 학원에서는 적응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경우이니까 말이다.
먼저는 우리 안에 주의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렇지 않으면 울화가 치밀어 애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멋대로 굴기 일쑤고 자기고집이 세며 공부는 안 하고 맨 게임이나 멍 때리는 데 골몰하니. 그러니까 우리는 별 수 없다. 주의 마음을 주셔야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음은 그 사랑을 달라고 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아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 아버지의 사랑하심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된다. 그 부모는 또 얼마나 모순덩어리인지, ‘그런 애’를 맡기고는 요구가 많다. 어쩔 땐 아이를 상대하는 일인지 그 엄마를 상대하는 일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이다. 이런 표현은 조심스럽지만 문제 아이에겐 문제 엄마가 있다. 괜한 논리가 아니다.
좀 답답하다며 아내가 수업을 끝내고 교회로 나왔다. 가정예배를 교회에서 드렸다. 딸애는 야간진료 때문에 퇴근이 아홉 시였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12:20).” 그와 같은 주님의 마음과 사랑을 달라고 구한다. 내가 환자인데 내 곁에 환자를 붙이시면 어쩌겠나? 나야말로 치료제를 이미 썼어야 하는 긴장과 초조를 달고 사는 사람인데, 뜬금없이 우는 아이를 과연 어쩌란 것인지. 그냥 엎어져 자고, 뭐라 해도 들어 처먹질 않는데!
그래 맞다. 내가 아무리 잘나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아니면 그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다. 곧 주님의 마음이 아니면 안 된다. 주의 사랑이 아니면 우리 사랑으로는 가당치도 않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미움이 먼저 일고, 어떤 셈을 바라고, 어떨 땐 얄밉고 꼴도 보기 싫어서 당장 그만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게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니까!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시 144:2).” 나는 돌이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아이에게, 누구에게 어떤 미움이 들다가도 내가 저보다 더했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 염치가 없어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도할 때 저들을 대하는 주의 마음과 주의 사랑을 구한다. 아니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벌써 그 속이 다 읽히는데 공치사를 하며 이렇게 저렇게 말을 이어가는 걸 보며, 그래도 교회를 생각해주는 마음으로 들을 수 있으니 것도 고마움이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경건을 자처하는 일은 위선이었다. 주님은 나의 어떤 고귀한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신다. 그 마음,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19).”
그러므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 내 마음을 주께 두심이 보물 같았다. 못하겠다고, 내가 어쩌자는 게 아니라, 주께서 하시라는 차원에서도 그저 묵묵히 ‘괜찮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저가 주의 양일지 아닐지 우리가 가늠할 게 아니라, 그저 본이 되는 삶으로.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시 95:2).”
그러니 감사함으로 받자.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그게 우리 의지로는 안 되니까 또 주께 아뢰어 구하는 것이고. 다만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그러기까지 얼마나 같은 마음을 반복해서 훈련해야 하는지, 또 선한 말을 구사하고 연습해야 하는지.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어요? 다음 주에 모 안전공사 수기공모를 써서 보낸답시고 글을 쓰다말고 뜬금없는 소릴 하였다. 자꾸 써. 쓰고 또 써. 꾸준하게 써. 그냥 써. 하는 나의 말이 장난스러웠으나 나는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몇 주째 빌려간 책을 그대로 가방에 들고 다니는 아이였다. 일주일에 한 편 일기를 쓰는 일도 글방 오기 하루 전에 숙제니까 간신히 쓰면서 무슨! 하다못해 게임을 잘하려고 해도 자꾸 해야 하는 것인데.
내 말이 그 말이다. 나는 사실 주님의 마음을 구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러려니 하고 내가 어찌 흉내라도 내려고 하면 너무 위선적이어서 말이다. 그러니 그저 반복할 수밖에. 또 구하고 바라기를 쉬지 않을 수밖에.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그렇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갔을 바로 그 길이다. ‘믿음의 역사’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3).” 되풀이해서 또 기억하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의식해서 반복하고 연습하고 연마하는 수밖에. 나는 내가 그럴 수 없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나의 위선과 온갖 부패한 생각들까지도 주께 내어놓는 일에서부터. 오늘 말씀은 그래도 된다는 소리로 읽힌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는 사랑이시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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