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전봉석 2018. 3. 30. 07: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마가복음 5:34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시편 116:7

 

 

 

주가 함께 하심에 대하여.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일에 얽매이지 않도록. 그 마음을 다해 주를 바라며 아이에게 또한 곁에 두시는 이에게 향하여 나타내고 증거 하는 날들이 될 수 있도록. 그러하기를. 그러므로 주께서 오늘 우리의 생활을 돌보신다는 데 확신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편의 이야기를 주목하게 하신다. 서로 연결고리가 없다. 각각 별개의 이야기다.

 

한 이야기는 ‘군대’ 귀신이 들려 아무도 저를 어쩔 수 없었다. 묶어두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막 5:4).”

 

또 한 이야기는 열두 해 혈루병을 앓는 여자다. 이는 부정한 일이라 예식에도 참여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27-28).”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관리로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다. 저의 딸이 죽어간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22-23).”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속수무책 아무런 방도도 없는 가운데 예수를 만났다. 이에 각각 예수님을 만남으로 해결되는 일도 오묘하다. 군대 귀신에게서 놓여난 이가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20).”

 

병에서 놓여난 여인은 구원하심으로 건강을 회복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야이로의 딸은 이내 죽었다가 살아나는 육체의 부활을 이룬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41).”

 

다시 묵상해보면, ‘주가 함께 하심에 대하여’ 그 모든 결말은 승리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의 일에 얽매이지 않도록 하신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리 기도하였다. 우리로 우리 일에서 놓여나 우리 곁에 두시는 일에 매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겠다. 그 마음을 다해 주를 바라며 아이들에게 더욱 신경 쓸 수 있도록 하신다. 또한 곁에 두시는 이에게 향하여 주를 나타내고 증거 하는 날들이 되게 하신다.

 

딸애는 어렵지 않게 더 나은 곳으로 취업이 되었다. 아내는 늘 처한 형편에 쩔쩔매는 것 같지만 그때마다 채우시고 흔들어 넘치게 하시는 손길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의 생활을 돌보신다는 데 확신한다. 각각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자기 문제’에서 놓여나게 하시는 것이다. 일의 우선순위는 분명하였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 된 동거의 날들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육신에 있으나 육신에 속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자꾸 어디가 아프다. 뭐가 힘들다. 무엇 때문에 불안이 떠나지 않는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근심이 또는 초조가 우리를 엄습한다. 내 의지로 이와 같은 육신의 일을 벗어날 수는 없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길뿐이다.

 

그 증거는 뚜렷하다. 만일 거하시면 육신을 살고 있지만 영에 속한 삶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동거하는 일이다. 이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곧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보이는 것으로 행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행함이다. 이를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겠으며 누구를 설득해서 알려줄 수나 있는 일이겠나?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17).” 나도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일이다. 안 믿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일이다. 아이엄마와 상담하다 아내가 어찌 수업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이의 영혼을 붙들고 기도한다. 이제는 이를 위해서도 가정예배를 꼭 드린다. 말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대신 아뢰고 구할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을까? 그 결과는 승리뿐이다.

 

여기 오늘 본문의 말씀도 나는 그리 묵상할 수 있다. 저들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귀신도 단순하게 미친 정도로 든 게 아니라 군대라. 저를 쇠고랑을 묶어두어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또는 여인으로 열두 해째 하혈을 한다. 누구에게 내보이며 어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죽는 것보다 못한 저의 처절하였을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딸애가 죽어가는 야이로의 심정을 짐작해본다. 분명히 저들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다 해보았을 것이다. 손쓰고 애써 어찌 방도를 다 찾아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기까지 기다리신다. 과연 저들의 예수는 수많은 군중들의 예수와는 달랐다. 다만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나을까, 하는 절박함의 예수였다. 다른 더 좋은 수는 없었다. 오늘 나에게 예수란 나의 남은 생을 다 바쳐도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예수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더는 귀신에 휘둘리고 혈루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소녀야 일어나라. 달리다굼의 역사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16:7).” 그 목적은 단지 어느 문제에서 놓여나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 죽었다 살아난 소녀도 이내 또 죽을 것이다. 혈루증이 나았어도 여인은 또 생리를 해야 할 것이다. 군대 귀신에서 놓여났어도 또 저는 마른 혈기에 시달릴 것이다.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이 땅의 모든 나음은 임시다. 잠깐이고 전부가 아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병에서 나음을 입었고, 죽었던 아이가 살아났다 해도 이는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없다. 초보적인 것이다. 특별히 맛만 본 것이다. 다시 그 교훈의 터를 닦을 게 아니다. 또 다시 살면서 귀신에 붙들리는 일이 없겠나? 병들어 고생하는 일이 생기지 않겠나? 기어이 죽음은 찾아오지 않겠나?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란 게 아니라, 더는 그런 일이 우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 우리의 구함은 그 차원이 다른 것이기를 바란다. 물론 여전히 안 아프기를, 좀 나은 형편이기를, 하는 일이 잘 되기를 구하고 그것으로 찬송하며 기뻐하지만 더 나은 차원의 일을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여전히 육신의 고통을 곁에 두셨다. 쪼들리는 형편을 되풀이 하신다. 어떤 근심이 또 걱정이 여전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는 것이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시 116:8).” 나의 영혼을 사랑함이다. 아이들의 영혼을 두고 주께 구하는 일이다. 단지 성적이 오르고 더 많은 아이들이 몰리고 그래서 수입이 늘고 사는 게 윤택하여지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 5:20).” 전파하는 사명이다.

 

더는 그 병에 붙들리지 않는 사명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죽었던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41).” 궁극적으로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도를 초보적인 데서 행사하고 누리는 것으로 그치는 삶이 아니다.

 

초보를 버린다는 일은,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해 더는 연연해하지 않는 일이다. 이미 다 이루어진 일로써 육신을 입고 사는 이 땅에서는 여전히 되풀이 되고 또 연연해하다 쓰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일이겠으나, 이젠 다시 그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않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일’이다(히 6:1). 그저 다만 무던히 나아가는 일이다. 더는 그러한 게 걸림이 되지 않는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러므로 내가 가진 최고의 신앙은 나의 재능이나 수고와 열심이 아니라, 나의 전부를 주께 내어드리는 일이다. 맡김이다. 주께서 맘대로 하시게 나에 대한 주장을 나는 포기하는 일이다. 나의 어려움은 물론 나의 열심도 더는 나를 주장하지 못하는 일이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 이제는 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3-4).” 이게 가장 현명하고 밝은 일이었다. 오늘 시편을 그리 되새겨서 묵상한다.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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