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20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시편 118:27
내가 나를 주께 건다는 것. 모든 걸 주께 의탁하는 것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매력에 끌렸다. 뭔지 모르지만 남달랐다. 모든 걸 버려두고 주를 따랐다. 하지만 저들의 3년은 예수님의 ‘따르라’와 다른 것이다. 자신들이 기대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다. 더 나은 사회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하였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예수를 팔았던 유다는 이내 목을 매어 죽었다.
내 맘대로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 아이와 길게 얘기를 나누면서 내 안에 주시는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내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다. 전에는 내 의지적으로 무얼 꾸미고 더해 수고하고 애쓰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젠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시 118:27).”
주께 제물로 드려질 나를 제단 뿔에 맨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말해주고 싶었다. 목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라.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안 믿어지는 게 당연하고, 종교적인 것에 어떤 거부감이 드는 일은 마땅하였다. 길거리에서 광고전단을 나눠주듯 교회마다 전도지를 돌리고, 친절을 행사하며, 가가호호 방문하여 종용한다. 이단들의 열심이 더해서 나 또한 거부감이 드니 말이다.
와 보라. 같이 가자. 그러니 내가 아이에게 권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나에 대한 호감을 저의 안에 두시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어떻게 빛 가운데 사는가를 보여줘야 할 거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 그 기대와 소원에서 놓여나게 하신다.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내 안의 성향이 바뀐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 나의 연약함이 저에게 힘이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뭐? 나는 아이에게 다그치듯 묻기도 했다. 얼마나 자신이 불행한지, 남들처럼 가정이 평온하지 않고 몸은 어디가 아프고 마음은 늘 어두운 것에 대하여, 그래서 뭐? 우리의 약함에 주의 강함이 드러난다는 데 주목하였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렇듯 나의 어리숙함이 또는 안 된 모습이 아이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인가,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내 안에 이글거리는 온갖 더러운 것들에 대하여 더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것이 나를 더럽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
그런데도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시 118:28).” 나의 그런 것을 알게 하시고 이를 주께 아뢰어 도우심을 바라게 하신다. 그러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7:21-23).”
말을 하면서 나는 내 속에 득실거리는 더러움을 보았다. 말씀은 이를 비추신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그러했던 나의 날들을 기억하게 하신다. 그럴 때 추구하고 바라던 것의 허상을 잊지 않게 하신다. 어쩌면 내가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은 그 말이었다.
자기연민이 얼마나 추하고 역겨운지. 자기숭배를 조장하여 그 감정이 또 목적이 우선이 되게 하는 것이 다 그래서인 것을. 나를 놓아두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뭐? 힘드니까 뭐? 외롭고 괴로우니까 뭐? 자기연민은 남을 부러워해서 생기는 자기에 대한 꼴불견이다. 남들보다 나만 못난 것 같다. 더 괴로운 것 같다. 다들 잘만 사는데 나만 어려운 것 같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나를 부인하는 일은 나에 대한 신념이나 나름의 자기원칙을 포기하는 일이다. 게임에서 위로를 찾는다는 말에 나는 아이에게 그러는 자신을 쳐야 한다고 일렀다. 안 되니까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하면 될 것 같았다.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가운데서 내가 살아왔던 날들이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알 수 있었다. 벌써 죽어도 죽었어야 할 위인이다. 누구보다 자기연민에 빠져서 살았고 자기 고집이 강하였으며 자기만 우선하는 삶이었는가를 새삼 되새길 수 있었다.
그런 나를 여기까지 참고 또 기다리신 주의 은총이 나로 하여금 이제는 아이를 기다리게 한다. 참고 견디게도 하신다. 내가 하는 노력이 아니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8:1).” 이를 알게 하는 것이 나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는 데 있었다. 어느 청년이 주를 따르겠다고 하였을 때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정말 이 일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할 수 있게 하시는 이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돌아갔을까? 딸애와 아내가 둘 다 오후에 머리를 하는 바람에 두어 시간을 더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게 싫지 않았다. 아이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뭐? 나는 문득 아이의 상황에 대하여 다그치듯 물었다. 연민을 경계하고 싶었다.
공부를 못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런 아이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집중되었기 마련이고, 이를 핑계로 저것을 소홀히 하든지 저것을 핑계로 이를 소홀히 하든지, 슬픔보다 무서운 자기 사랑은 없는 것이다. 뭐라 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끊임없이 댄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다. 기다림이다. 참음이다. 한 영혼이 돌이켜 주 앞에 나오기까지, 주가 나를 얼마나 어디까지 참고 기다리셨는가를 아이에게 말해주다 알았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15:3).” 주님, 하고 부르며 아이에 대해 고하였다. 내 안에 이는 마음이 주의 것임을 확신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그 영광을 아는 빛이 나를 비추시는 것이다. 내가 나를 주의 제단에 붙들어 매어 제물로 삼을 수 있는 이유였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9).”
거룩은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내가 주로 미쳤다. 넌 모를 거야. 네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많이 생각하고 또 염려하며 마음이 쓰인다는 걸 말이야. 나도 모르지. 내가 왜 그러는지. 왜 자꾸 널 위해 기도하는지, 나도 모르지. 하는 내 말을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들었을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리하여 시달리는 마음이 견딜만한 것이다. 싫지 않은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말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주가 하셔야 하고 그래서 주시는 마음이라면, 그것으로 아이를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복이었다. 내게 더하신 귀한 사명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이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시 118:5).” 누구, 누구, 누구… 마음에 두고 생각한다. 주가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실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7).” 곧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8-9).” 안 들으면 모를까, 들으려 하고 듣는 데야 별 수 있나. 하찮고 부족한 사람을 두시고 주를 증거 하게 하신다.
이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17).” 곧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24).” 나와야 할 아이들을 붙드시고 깨우시고 일으켜 주시기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25).” 그러할 때 나는 나를 주께 내어놓는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27).”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8-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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