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가복음 6:34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2
우리에게 두시는 마음은 예수의 마음이시다.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주의 것이다. 우리의 이해와 편견은 그 마음을 그르친다. 나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아이들에 대하여 그 가정과 부모의 사정을 두고, 우린 먼저 주의 마음을 바란다.
주의 마음을 바라면서도 어찌 임의로 내가 주의 마음을 판단할 수 있을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 11:34).” 나서서 내가 어찌 행하려고 하는 데는 다 그만한 고집과 아집이 앞서는 일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그대로인 것 같으나 내 안의 나, 나의 성향은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치과에 들렀다가 어깨가 아파서 한의원으로 들어갔다. 얼결에 그리 한 일이다. 저는 맥을 짚더니 무슨 역술인처럼 말하였다. 몇 번 더 오라는 걸 한 번으로 족하였다. 안 믿는 이의 게걸스러움은 이제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은 여러 증상으로 몸이 말하고 마음이 듣는다. 어떤 불편함이 가장 먼저 드는 음파다. 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인데, 저가 지금 교만을 떠는구나 싶은 것을 안다. 나름 신비한 느낌이었다.
반대로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가듯이 아이들 중에 어떤 아이에 대해서는 자꾸 더 신경이 쓰인다. 그 아이 때문에 힘들면서도 그 아이로 인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언제부턴가 우리의 화두는 온통 아이들 이야기다. 아마도 그건 요즘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어서 그럴 것이다. 겉으로는 힘에 부쳐 짜증도 나지만 속사람은 그것으로 주님의 성향을 닮아가는 게 된다. 더는 내가 알던 내가 아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설교 원고를 교정보고 주보까지 출력을 끝내고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면서, 어느덧 한 주를 마감하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어떤 말을 하고 무슨 생각으로 살았나, 하는 게 설교 원고로 정돈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처럼 매일 이루는 묵상이 그 발판이 되었고 무엇으로 씨름하였나, 싶은 것이 글의 가닥을 잡는 것이다. 임의로 부는 바람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쓰였다는 게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은. 늘 내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지만 내가 목사가 된 것이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과 이를 묵상하며 걸러진 생각이 또 마음을 주도하면서 이를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보여줄까? 내게 더하신 마음을 들려줄 수 있을까? 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것이 말이다. 한의사는 맥이 좋지 않다며 이런저런 나의 형편을 점쟁이처럼 맞추었다. 돌연사를 할 수 있으며 풍이 올 수 있고 똥오줌을 받아내야 하는 처지가 될 수 있고, 그러니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에 나는 어떤 두려움보다 그것에 크게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것이 더 신기하였다.
이제는 바로 아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오히려 저녁께 내가 자꾸 마음을 두고 있는 아이가 학교에서 상담실을 찾아 무슨 상담을 하느라 늦게 왔다는 말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만큼 힘에 겨운 것인가, 싶다가도 행여 또 그것이 고착되어 자신을 스스로 ‘그런 아이’로 여겨 자기연민에 빠지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됐다. 때론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참 더디다. 너무 느려서 속이 터질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또 주님의 마음이 아니겠나?
아이도 어쩔 수 없는 거야. 걔 말투나 행동도 자신은 그리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이야. 우리가 그냥 ‘싸가지 없다.’ 하고 욕을 할 일이 아닌 것이지. 그 애 몸에 밴 일이야. 그 환경에서 그 처지에 맞는 말투가 또 품행이 젖어든 것이니까, 물론 예의 없고 되바라진 태도 때문에 화딱지가 나지만, 그래서 더 주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야. 아내에게 그리 일렀던 말씀이 오늘 아침 내게도 더하신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왜 우리에게 이 마음을 주시는지, 그래서 우리더러 뭘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 할 수 없다고 여길 때마다 우린 또 어떤 말투와 품행이 몸에 배이게 할까? 투덜거리며 아이를 흉보는 것으로는 어림없다. 그 아이 부모를 욕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그러니 내버려두거나 ‘원칙대로’ 정 어려우면 아이엄마에게 알리고 그만두게 하는 일 따위는 옳지 않다. 여느 안 믿는 사람들도 그런 처방을 내린다. 그런 식으로 위협한다. 밥벌이를 위한 게 아니다. 믿는 자로써 우리와 저들의 차이는 간단하다.
우리는 저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위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다. 단지 오늘 아이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이 아니다. 멀리 보고, 아니 주님의 시선을 좇아야 한다. 나 역시 아내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도움은 주님뿐이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외롭게도 하신다. 아프게도 하신다. 신음하는데 그대로 놓아두시기도 하신다. 그 자리에서 믿는 자는 감사를 배우고 안 믿는 자는 원망을 배운다. 같은 고통인데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이다. 이 또한 내 의지나 내 결단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어두울수록 더 빛나는 법이다. 마음이 무겁고 생각이 많아 복잡했는데, 락스를 뿌려 복도까지 물걸레질을 다 끝내고 난 뒤 창 가에 앉아 송글송글 맺힌 땀을 식힐 때, 돌연 내 안에 듣는 말씀이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
내가 건강하다면, 녹록하여 그저 만만할 따름이라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한 어림없는 일이다. 아내가 투덜거리듯 아이의 이런저런 면을 토로할 때 나는 아주 유치하게 말해주었다. 그 정도니까 우리한테 보내시는 거야! 애가 그보다 나으면 우리한테 오기나 하겠어? 상술적인 표현으로 들면 틈새시장 같은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바닥을 긴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아주 산산조각이 난 경우다. 그런 가운데 아이의 영혼은 피폐하고 강퍅하여져 모두가 더는 손을 쓸 수 없다.
'군대' 귀신이 들린 것 같다. 열두 해째 혈루증을 앓는 일 같다. 이미 끊어진 야이로의 딸 같다. 우리가 뭘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속이 터지고 화도 나지만, 그런 아이를 우리 곁에 붙이시는 것은 우리가 먼저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그러다보니 가정예배의 기도는 이제 대부분이 아이들 얘기다. 맡기셨으니 이를 건사할 수 있는 힘도 주실 것을 아뢴다. 짜증에 겨워 속이 터질 것 같다가도,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어떠하셨었나?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우리에게 향하신 은혜가 깊고 많다. 이 또한 성령이 주셔야 알 수 있는 마음이다. 누가 한탄한 소리처럼, ‘넘어지고 쓰러지다 보니 인생은 사라지는구나!’ 하는 따위의 절규가 나의 노년에 더해지지 않기를. 성령을 의지하여 성령을 늘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성령은 달라면 주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그러므로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2).”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죽어야 한다. 성령으로 행하라. 전에는 그럴 수 없었다고 해도 이제는 가능한 일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리 여겨 구하고자 하는 마음도 주신 것이다. 아내에게 그리 이르면서 그 말은 내게 하는 것이었다. 주가 오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그러므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주께서 보증이 되셨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 가진 재물도 없고 건강도 시원찮고 이런저런 여건이 말이 아니라 해도,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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