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기도할 때에 용서하라

전봉석 2018. 4. 5. 07:14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25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시편 120:7

 

 

 

용서가 되는 일과 용서할 수 없는 게 있다. ‘주의 때’를 알지 못하는 일과 ‘하나님의 곳’을 온전히 여기지 못하는 것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용서는 너그럽게 봐주는 일이다. 그럴 수 있는 게 있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게 있다. 무화과나무가 말랐다. 만물의 주인이신 주께서 시장하신 때에 열매를 가지지 못했다. 아직 때가 아님에도 나무는 저주를 받아 말랐다. 성전에서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일에 대해서도 용서가 되지 않았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가차 없이 꾸짖고 나무라신 ‘주의 때’와 ‘하나님이 계신 곳’에 대해 그 입장을 분명히 하셨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눅 23:29).” 그래서 ‘그 때’와 ‘그 곳’은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죽기 직전까지 우리는 그 때와 그 곳의 기회를 얻는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눅 23:39-40).” 그러므로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마 24:40).” 황당한 일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41).” 누군 이렇고 누군 저렇다. 그 때와 그 곳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42).”

 

무화과나무 입장에서는 아직 때가 아니었다. 그럼 주님이 성급하신가? 성전에 있던 상인들은 억울하다. 늘 관행처럼 서로 묵인하고 암묵적으로 그리 해오던 일이었다. 그럼 주님이 부당하신가? 한 편의 강도가 입을 연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눅 23:41).” 그러니 우리의 이성적인 안목으로 어찌 이 말씀을 받을 수 있을까? 누군 억울한 것이고 누군 합당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주인이시다.

 

그리고는 이르시되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기도를 위해서도 용서가 필요하다. 하나님과 막히는 게 없이 행해야 한다. 이를 베드로 사도의 증언으로 들어보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또는 그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 같이 여겨 지식을 따라 동거하고(벧전 3:7).”

 

용서와 기도는 한 그릇에 담는다. 저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이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11:4).” 용서함으로 기도할 수 있다. 이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17:3).”

 

‘그 때’와 ‘그 곳’을 늘 명심하며 사는 일에 대하여 용서는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고 기도는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나의 심령의 가난함으로 천국을 받는 일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오직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시다. 주의 도우심으로 찬송한다.

 

그리하여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내가 누구를, 저 아이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긍휼함을 얻는다. 저를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는 일이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절대 순응한다. 내가 어떠했고, 그럼에도 어떻게 나를 용서하셨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과 용서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그 구분을 명확히 하신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4-5).” 아흔아홉의 용서할 게 없는 이보다 하나의 용서가 필요한 이를 구하신다.

 

그러므로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원하실 때에 열매를 얻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죽이시고, 성전을 경홀히 여기는 일에 화를 내시지만! 기도를 위해서는 용서를 해야 하는 일임을 분명히 하신다. 그와 같이 단단한 마음으로 섰어서 싸우자고 드는 세상이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시 120:7).”

 

용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부르짖는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주께서 아신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139:1).” 나는 어두울 때 주를 바란다. 그럼 주님은 확신을 더하신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내가 저기 서 있을 때는 하나님이 편협하신 것 같더니 내가 여기 서 있다 보니 하나님의 편애하신다. 불공평하지 않은 사랑이 어찌 사랑이겠나?

 

공평하면 그게 어디 사랑이겠나? 막연한 말로 쑥덕거리는 신앙은 어림없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그러니 어쩔 것인가? 너는 좌하라. 그럼 나는 우할 것이다.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할 것이다.

 

아이와 수업하다 그리 설명하였다. 아프지 않은데 그게 어디 사랑이겠나? 아무렇지도 않는데 그게 어찌 관심이겠나?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저주를 받아 시들었다. 바로 그때 만유의 주재이신 이가 열매를 원하시던 때였다. 이는 부당한가? 성경은 역설의 언어를 취한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저는 하나님이시다. 믿음이 없이는 이 계시를 열어볼 수 없는 일이구나.

 

너로 인해 내가 마음이 쓰이는 것. 자꾸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일. 다른 여느 아이에 대하여는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왜 너는 내게 의미가 되는가? 그곳이 성전이어서, 마침 그때에 주가 그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원하심으로! 죄란 주를 맞을 때에 그 자리에 없는 일이다. ‘미련한 다섯 처녀’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필 그때에. 하필 그곳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를 아는 자는 아멘 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게 무슨 소린가, 못 알아듣는 이에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겠다. 그러니 너는 택하라.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시 44:26).”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사는 일이 충성이었다. 사랑이란 저만으로 충만한 것이다. 그로 인해 모든 게 합당하였다. 이를 어그러뜨리는 게 종교적인 습관이다. 공연한 기준이다. 나름의 이성이다. 가치다. 판단이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 10:9).”

 

아이로 인해 내 마음이 들끓는 덴 다 그만한 사랑이었다. 주가 그리 하시게 두는 일.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내가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은 내 이해와 상식을 버리는 것이다. 주님이 그리 하시는 일에 대하여,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나를 말씀 앞에 붙들어 앉히시고, 이르시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 앞에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는 것이 마음을 새롭게 하심이다. 변화를 받는 일이다. 나의 거듭남이 하나님의 기쁘심이고 온전하심이다. 그 뜻을 이루려하시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기도하게 된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시 120:2).”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첫 걸음은 회개였다. 용서를 받지 않으면 용서를 할 수도 없다. 나의 나 됨을 통회하는 일,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3).”

 

내가 나를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저 요란한 소리로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7).” 이와 같은 세대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그럼에도 용서하고 기도하라. 오늘 말씀은 특명 같다. 사화하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 5:25).”

 

왜 그래야 하냐면 주의 사하심을 받은 자로서,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그러므로 복의 근원은 그때에 내가 그곳에 있는 것이다. 모든 성경의 원리는 하나였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