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50
내가 연기 속의 가죽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19:83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지 않으면 무엇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살며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이라니.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소금이면 소금의 맛을 내는 삶이었다. 빛이면 밝음으로 어둠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그로 인해 내가 연기 가운데 가죽부대 같으나 말씀의 위로로 산다. 곧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고난이 내게 유익한 것은 돌이켜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음이다. 이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 얼마나 시달리며 살았던가?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 9:22).”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순간순간이 나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지키게 한다. 명료한 진리 앞에서 내가 배우는 것은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23).” 믿음으로 능치 못함이 없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24).”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 없음을 솔직히 인정할 수 있는 일,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29).”
그러므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구나! 온전히 주의 사랑의 대상은 나였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이를 나에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으로 듣고 바랄 수 있을 때,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그 위로와 인도하심을 붙들 수 있는 게 귀하다. 지난겨울은 어떠했다 한들, 안 올 줄 알았던 봄이 왔다. 모든 게 지나간다.
노인은 어디 조그맣게 텃밭을 임대해 고랑을 내고 상추와 시금치와 쑥을 심었다. 고추는 아직 일러 이달 하순은 돼야 할 거라고 하였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 손바닥만 한 밭떼기도 그처럼 손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오후께 저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내 안에 두시는 아이들을 생각하였다. 고작 몇 명 되지도 않는 아이들로 내 마음은 부산하고 어려웠다. 얘는 여전히 약물에 의존하는지, 아직도 사귀는 아이와 동거를 하고 있는지, 너무 좋은 직장이라 돌이키기 어렵지는 않겠는지, 이단 교회에서 벗어나기는 했는지, 가슴에 종양은 어떻게 됐는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마음은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어떻게 연락도 해보기 뭐한 단계라 묵묵부답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하필 어디서 읽은 연구 내용이 오늘날 신생아 40%가 혼전관계에서 임신으로 태어나고, 부부의 50% 이상이 이혼을 하며, 65세 이전에 사망하는 경우 75%가 자신이 선택한 그릇된 습관 때문에 죽는다고 하였다. 음주, 흡연, 과도한 다이어트, 운동 등. 가장 부유한 나라에 노숙인이 한 나라의 인구보다 많다는 통계도 보았다.
하긴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하나님도 없고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무슨 일을 한들 그게 어떠한가! 유명한 배우이면서 영화감독 우디 알렌은 스물두 살 한국인 여자 아이를 수양딸로 입양하였다가 사랑에 빠졌다. 앞서 저는 이혼을 하였는데 전 남편에게서 난 부인의 딸애를 성추행하다 발각되었다. 그럼에도 저는 항변하였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했을 뿐이다. 그런 일에는 논리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졌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말 그대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상실한 시대다.
자기의 즐거움밖에 모른다. 고통을 극도로 싫어하며 적자생존의 동물의 날들과 다를 바 없이 되었다. 이를 한 희극인은 ‘날개 없는 닭들의 시대’라고 하였다. 흰 닭가슴살코기만을 원한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의 말씀은 어불성설 같다. 도무지 이치에도 맞지 않고 말도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 9:35).” 그러니 누가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6-37).” 가장 빛도 안 나고 어떤 효과도 드문 대상이다. 기껏 좀 나아지려나 싶으면 변덕이 또 부모의 막무가내 훼방으로 덜커덕 벽에 부딪치기 일쑤다. 그럼에도 다시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42).”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겠으나 우리는 자꾸 아이들 편이어야 한다고 아내에게도 이른다. 아이엄마가 요구하는 것은 항상 모순되다. 공부 잘 하고 말 잘 들으면서 아이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은 박제된 밀랍인형 같은 아이를 요구하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공부도 시켜야 하고 그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도 알게 하여, 우리가 저를 주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기를. 이내 주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건사하고 마주할 수 있게 하시기를. 우리는 다만, 기도밖에는 이와 같은 능력이 나올 수 없다는 데 고개를 숙인다.
그러자니 스스로 불편함을 더해 살아가는 수밖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43).” 또한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45).” 곧 그리스도인을 산다는 일은 스스로 불구자로 사는 일이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47).” 지옥 또한 영원한 곳이어서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48).” 곧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49).”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이가 천국에 이른다. 어릴 적 나의 주일학교 선생님은 그리 설명해주었다. 성경은 믿어지지 않는데 지옥에 갈까 두려워하는 어린 나에게 그와 같은 두려움은 천국에 들어갈 자들만 간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두려움을 상실한 시대다. 선악의 기준이 모호해지면서 일부다처제가 공공연하게 애인을 두고 혼외관계로 살아가게 하고, 근친상간을 일으키며 동성애가 성행하여 항문성교나 기이한 성적 쾌감을 추구하게 하였다. 유아성도착은 물론이고 동물과의 교접도 마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저 다만 끊임없이 일어나는 격정적인 갈망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한 파국의 지점은 놀라운 과학의 발달과 교육의 진보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성범죄와 폭력사태가 전에 비해 다섯 배가 증가하게 하였다.
이는 소금이 그 맛을 잃어서다. 오늘 말씀은 이를 지적한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50).” 우리가 서로 화목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다. 한 사회에 신앙의 기준을 잃으면 도덕과 양심은 마비된다. 오늘 우리 사회의 미투 운동은 이를 반증한다. 날마다 뒤통수 맞는 기분이다. 남들 앞에서 ‘딸 바보 아빠’로, 지극히 ‘가정적인 가장’으로, 누구보다 아내를 사랑하는 인물로, 정의와 인권을 부르짖던 이였다.
그러게. ‘오늘은 날개 없는 닭들의 시대’다. 흰 살코기를 원하는데 날개가 돋아난다면 가차 없는 것이다. 도덕의 붕괴다. 양심의 마비다. 모두가 멀쩡한 문둥병자가 되었다. 이를 느낄 때 나는 기도한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시 119:63).”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83).” 그래서 우리의 어려운 형편이 또 사정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도 있게 하시는 것이구나!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어려움을 통해 주의 이름을 부른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 그리하여 나는 이제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기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내게 있던 어둠도, 어려움도 궁극적으로는 주의 은혜라. 값진 선물이었다. 주를 아는 기회였고 주를 나타내는 통로였다.
주는 성실하시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시 119:75).” 그러므로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의 증거들을 알리이다(79).” 내가 주의 증거가 되는 삶.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들에 완전하게 하사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80).” 이는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81).”
다만 주의 말씀으로,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94).” 곧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 이에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10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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