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마가복음 10:52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시편 119:105-106
아이가 얼굴이 밝아진 것 같아 좋았다. 수더분하니 말도 곧잘 하고 눈을 마주쳐 귀담아 듣는 모습도 좋아졌다.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자기 이야기는 뒤이어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돼야 한다는 데까지 설명이 닿았다. 그저 내 이야기로 내 안에 들어차있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도리어 막힌 담 같고 눌린 돌 같이 가슴이 답답하다.
이를 풀어내어 문장을 입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서 조금씩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이내 너의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이야기는 읽혀져 하나님의 이야기를 발견한다. 아이의 글이 지나치게 몽환적이고 관념적이었다. 숨는 것이다. 자꾸 돌려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럴 수 있다. 내 이야기를 형상화할 때 우리 이야기가 되어 공감을 이룬다. 그러느라 마주해야 하는 자신의 이야기는 때로 역겹다. 난감하다. 숨기고만 싶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우리의 만남이 또 나뉨이 더하여져 마치 우연 같으나 그 모든 일의 작정이 주의 것임을 말이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뭉뚱그려 한 마디로 요약한 뒤 더는 들어가지 않으려는 아이 이야기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러기 위해 주께서 눈을 띄우시고 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러면서 죄의 충동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2).”
보게 되어 예수의 길을 따를 수 있는 날까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이를 어떻게 하면 깨닫게 할 수 있을까?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56:3).” 두려워하는 날에 누구는 스스로 무장하고 누구는 더욱 주를 바랄 수 있는 차이에 대하여. 아이가 무장해제를 하듯 곁을 내어주는 것 같아 그것으로도 감사하였다.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말씀에 주목하였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아이들을 생각하며 주일 설교 본문으로 메모해두기도 하였다. 주는 나를 괴롭게 하신다. 소금에 튀는 것 같이 어려울 때도 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시 119:75).”
그러니 이는 지옥을 사는 데 있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는 것을 두렵게도 한다. 거기는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9).” 이 땅에 살면서 그 맛을 아는 자는 두려워할 줄 안다. 지옥을 염두에 둔다. 천국을 사모한다. 일찍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산다. 우리 안에 얼마나 데쳐지는 사연과 볶이는 일들이 많은지. 아이는 위경련이 잦았고 자주 장이 꼬여 고통을 호소하였다. 부모의 이혼과 언니와의 반복이 아이를 볶아댔다. 외로움이 이골이 났다. 무기력한 데서 안도한다.
어떻게 하면 저의 영혼을 깨울 수 있을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그리스도의 사랑이 든든하심을 어떻게 하면 알려줄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우리는 이길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사망 권세를 이기시었다. 두려우나 두려워할 실체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우린 육체의 죽음보다 더 큰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무슨 짓이든 다 가능한 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겁을 상실한 마당에 우리 안에 두려움을 두시는 이가 비로소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게도 하시는 거였다. 생각이 많고 몸이 굼뜬 아이였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슬픔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방치하려고만 굴었다. 이를 글로 풀어내어 자기 이야기를 대면하게 하는 일.
산문 쓰기를 가르치며 나는 그 모든 소재가 우리의 삶인 것을 말해주었다. 궁극적으로 내 삶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 무엇도 우연히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없음을.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하물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들에게는 더하시지 않겠나?
그래서 우린 고통의 미학을 안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고난은 없을 수 없다. 그게 나의 죄 때문이든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로 인함이든, 우리가 할 일은 주께 의탁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4:19).”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가슴 졸이느라 자꾸 속앓이를 하는 것이다. 어린 것이 왜 자꾸 장이 꼬이고 위경련을 자주 일으키겠나. 몸이 약한 아이는 아니었다. 조용조용 자기 이야기를 하는 아이의 시선을 받아내며 나는 주의 섭리를 생각하였다. 종종 놀라운 것은 이렇듯 우리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연처럼 날아든 것 같은 작은 씨앗이다. 하나님이 모든 걸 주관하신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 46:9).”
이를 알게 하시려고,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10).” 문득 생겨나는 기도 제목은 아이 언니가 함께 오는 것이다. 서로 반복하여 말 한 마디 주고받지 못하고 사는 가운데 내게 주시는 마음이 황당하였다. 이어서 이번 가을 추수감사절 때 아이에게 학습세례를 줄 수 있기를, 주가 기뻐하시는 것을 이루시리라.
혼자 은연중에 생각하고 기도하는 일이 되었으나 생각하는 것만으로 내 안에 기쁨이 듣는 까닭은 설명할 길이 없다. 많이 편해졌지? 아이에게 물으며 피식, 나도 웃었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애 3:37).” 주가 하시는 일이다. 그 일이 기이하고 경이로워 나는 아직 아이에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혼자 배시시, 웃었다. 우리가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가 입을 열어 주께 기도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을 상상하면서.
주가 우리를 이끄신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 119:105-106).” 서로 마주하게 하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님을 우러러 이 길을 가게 하심에 대하여,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에 대하여 나는 아이 앞에서 확신하였다. 내 안에 아이를 대하는 마음을 두신 이였다. 내가 얘를 왜? 하듯 신기할 따름이다.
아빠는 교회를 다니고 엄마는 성당에를 나가고, 둘은 이혼하였으나 같이 한 집에 사는 형국이라 전 남편의 딸아이인 언니는 혼자 떠도는 섬처럼 말이 없었다. 아이는 언니와의 반목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언니가 궁금하다. 주께서 어떻게 연결하실까? 내가 닿을 수 없는 지점일까? 그런 애를 두고 우리 교회에 나올 수 있기를, 우리와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주를 바랄 수 있기를, 꿈꾸다니. 나의 꿈꿀 권리에 대해 아이는 알지 못한다.
주의 이름으로 그 뜻하신 바, 주관하심을 확신하면 할수록 나에겐 ‘꿈꿀 권리’가 있다. 저들 부부가 화해하여 다시 한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이내 아이가 세례를 받아 주의 성령으로 우리가 하나 되기를.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 10:9).” 이 시대에 고리타분한 명제가 된 것 같으나 필연이었다. 나는 저들을 회복시킬 수 없으나 저들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하시기를 바라고 구할 권리는 있었다.
그러라고 오늘 내 곁에 이 아이를 두시는 게 아니겠나? 서로의 마음을 열고 계시지 않나? 아이의 얼굴이 밝아져서 나는 좋았다. 나의 이 좋아함이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떻게 말로 설명할까? 오늘 본문은 주께서 오신 목적을 언급하며 내게 행할 일을 알게 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섬기려’, ‘주려’ 하심에 대하여 이를 믿음으로 받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52).” 믿음으로 주를 따를 수 있는 일이었다.
아,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101-102).” 더는 세상을 기웃거리며 악을 도모하는 데 빠지지 않기를, 그럴 수 있는 데 있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 말씀뿐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
그러므로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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