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8 주일
마가복음 9:38-50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9: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9: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9:44 (없음)
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46 (없음)
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9: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물 한 그릇이라도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우리가 서로에게 잘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선의 결실도 아니다. 봉사와 헌신을 무슨 훈장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착함을 도모하는 일은 악함보다 위험할 수 있다. 자기 의로 삼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왜냐하면 그 일을 시작하신 이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선함을 이루어 가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다는 말씀이다. 이에 따른 상급은 자연발생적인 것이지 의도하여 그리 도모하는 일도 아니다. 곧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착하고 정의로울 수 있다.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천사의 말을 할 수도 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의를 구하고 목숨을 다해 선을 이루기도 한다. 오히려 더 강박적으로 말이다. 불쌍한 사람을 돕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위할 줄 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하다. 나름의 자부심을 갖는다면 말이다. 열에 아홉은 뿌듯함으로 자기만족을 누린다. 다만 우리는 저들과 다른 것이 우리들 자신이 ‘물 한 그릇’이 되어 내어줌을 이룬다. 보잘것없어 내세울 것도 없고 여긴다.
듣는 마음과 서로 다른 네 개의 마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앞서 솔로몬이 구하였던, ‘듣는 마음’에 대하여 되새겨보자. 저는 자신의 건강도 부도 출세와 성공도 구하지 않았다. 오직 주의 백성을 향해 듣는 마음을 바랐다. 이 또한 저들 백성을 위한 게 아니라, 그 백성이 주의 백성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저가 구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지난 주일에는 이어서 이 마음은 경작되고 다스려져야 하는 ‘네 개의 서로 다른 마음’으로 연관지어 우리 마음을 돌아보았다. 곧 좋은 마음 밭을 이루기까지 그 여정은 어쩌면 동일하다. 길가와 같은 마음으로,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막 4:15).” 길이 된 마음은 숱한 것들이 들락거리는 마음이다. 단속이 안 되는 마음이다. 열린 마음인 것 같으나 오히려 굳어진 마음이다. 갈아엎어 일구고 골라야 하는 마음이다. 아니면 뭐라 한들 들리지 않는다.
다음은 돌밭 같은 마음이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6-17).” 막힌 담 같이 억압된 자아다. 완고함이다. 다음은 가시떨기 같은 마음이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18-19).” 온갖 근심 걱정으로 말씀이 싹을 틔울 수 없다.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게 근심의 근본이다. 내 살 길을 모색하겠다는 걱정이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그리하여 경작하고 다스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20).” 비로소 열매가 있는 마음이다. 단지 어떤 성과를 거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를 오늘 본문으로 가져오면,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물 한 그릇이라도’ 이 보잘것없는 것이 그 어떤 전부보다 크고 귀한 마음이다.
그러기까지, 저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다. 사랑의 대상은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이기 때문에 기어이 나는 저에게 물 한 잔이 되어주는 마음이다.’ 그 열매는 때가 차매 추수하게 될 것이다. 서둘러 결실을 보려는 세상에서, 성과를 내고 이를 업적으로 삼으려는 이 땅에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한사코 말씀하신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9).”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내 안에 소금을 두고, 화목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들과 화목하는 게 우선이 아니다. 서로 잘 지내는 게 최선이 아니다. 앞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분명한 우선순위를 두셨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앞서 그 사랑의 주체를 분명히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리하여 “첫째는 이것이니,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서로를 위하고 남을 사랑하며 좋은 사람으로 보다 나은 이로운 세상을 만들라고 우리를 이 땅에서 살고 오라 하신 게 아니다. 착하게 살라는 것도, 선을 이루며 옳은 길을 가라고 하시는 일도 아니다.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그러할 때 사람과도 화목하다.
그러자면 저들과 달리 우린 우리 안에 소금을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향기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하나님은 빛이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그러므로 우린 빛의 자녀로 산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7).” 우리 안에 소금을 두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38-40).”
오늘날 신생아의 40%가 혼전관계에서 임신으로 태어난다. 부부 가운데 50% 이상이 이혼을 한다. 65세 이전에 죽는 경우, 75%가 그릇된 습관으로 인한 것이다. 가령 음주나 흡연, 과도한 다이어트와 운동, 공연한 스트레스와 자기 조바심으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유한 나라에는 노숙자가 많다. 그러니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하나님도 없고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무슨 일을 한들 그게 어떠한가!’ 가치혼동의 시대다. 겁이 없다. 영화감독 우디 알렌은 스물두 살 된 한국인 여자 아이를 수양딸로 입양하였다가 사랑에 빠졌다. 저는 당당하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했을 뿐. 그런 일에 논리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졌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상실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엡 5:15).” 즉 지혜란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주를 경외함이다. 두려워할 줄 아는 일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그 기준이 무엇인지 귀담아 들어야 한다.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간단한 원리 하나,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7-10).” 하지도 않고 받을 상부터 셈하는 아이들을 보면 할 말이 없다. 열심을 다한 사람은 상급에 구애받지 않는다.
곧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우리가 주의 제자가 됨으로써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이미 충만한 기쁨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곧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바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람으로 우리에게 주신 상-은혜와 두우심을 이미 받은 것이다. 저는 하나님이시다. 영생은 그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므로 그 좋고 좋은 천국의 이유는 하나님이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다. 도우심만 바란다면 굳이 저는 하나님이 아니어도 된다. 우상을 섬기는 일과 같다. 자기 필요에 대한 도움의 우상, 이를 추구하는 바람의 우상, 잘 될 것이라는 이상의 우상, 곧 자기만족! 그러나 성경은 역설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그래서 우리는 다만 ‘물 한 그릇’밖에 안 되는 자신을 주의 이름으로 내어드리는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막 9:42).”
살면서 어찌 누구를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상처를 주지 않고 자녀를 키울 수 없고, 부모의 마음을 모질게 하지 않고 자식으로 살 수 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눅 17:1).”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성경은 이를 직설적으로 제시한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롬 14:15).”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다.
남부럽지 않게, 꿀리지 않게, 당당하고 거침없이 살기 위해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출세도 하고 성공도 하는 사회에서 이 무슨 해괴한 소린지!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43).” 내 손으로 처리할 수 있는데 왜 가만있으라는 것일까?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45).”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데, 도대체 왜?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47).” 나름의 가치와 기준으로 보는 안목이 다 있다고 여기는 한, 이와 같은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할 뿐이다. 그런데 주님은 한술 더 떠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내가 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그 잘난 나로 인해 누군가가 실족하게 돼 있다. 그러니 내 손으로 내 손을 잘라야 하고, 내 발로 내 발을 꺾어야 하며, 내 눈으로 내 눈을 빼버려야 한다.
곧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더욱이 주를 믿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 대신 내가 표본이 되기 때문이다. 주의 제자가 아니라 나의 제자로 삼으려 들기 때문이다. 주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경우다.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지옥은 더 이상 탈출구가 없다. 물릴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다. 벌레도 죽지 않는다.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사 66:24).” 마귀와 그 추종세력들을 위해 예비 된 곳이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즉 우상 숭배자들이 있는 곳이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4:11).”
거기는 철저한 형벌만이 있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9).”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는 곳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둘째 사망의 불못이다.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3-14).”
나오는 말
우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자.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한 별 수 없다. 갈 데까지 가 봐야 아는 일이라면 끝내 그래보는 수밖에. 죽어봐야 아는 일이라면서 안이하게 군다면 그 또한 그럴밖에. 별 수 있겠나? 강제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우리가 할 일은 더욱 선명해진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그 기준은 소금이다. 내 안의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듣는 마음의 실체다. 이는 열심히 마음을 경작한다. 다스린다. 길가처럼 딱딱한 마음을 갈아엎고 일구어 돌을 고른다. 누군들 상처 없이 어른이 된 사람은 없다. 누군들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니 뭘? 하나는 데려감을 받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하나는 주를 바라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는 기어이 주를 조롱한다.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이들과 화목하자. 친절하자. 손해를 보더라도 참자. 그러나 이는 우리의 덕이 아니다.
내 안에 소금을 두고 하는 화목이다. 먼저는 내가 부패하지 않게 하고, 내 곁의 것을 방부할 수 있다. 누구라도 그 맛을 내어 잘 안다.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라 너그럽다. 그리스도인이라 먼저 용서를 한다. 곧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이는 먼저 하나님과 화목할 때 비로소 가능한 평안이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곧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 9:5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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