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2 주일
요 4:1-26, 5:1-18
사마리아 여자와
서른여덟 해 된 병자
4: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4: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4: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4: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4: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4: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4: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4: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4: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5: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들어가는 말
-견주는 사회에서, 예수님은 떠나시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요 4:1-3).”
우리는 가시적인 실적과 성과를 중요하게 여긴다. 사회는 물론이고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 규모와 성도의 숫자와 헌금의 정도와 어떤 행사들 여부를 가려 부흥을 논하고 목회의 성공을 견주어 가늠한다. 이에 대한 말씀의 경고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하는 저들을 향해,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오늘 우리는 본문을 열기에 앞서 예수께서, 그리하여 유대를 떠나셨다는 말씀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본문의 말씀, ‘사마리아 여자와 서른여덟 해 병자’로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 안에 고착된 신앙의 병세를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참으로 고질적이어서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우리의 이야기다.
1. 사마리아 여자
① 물을 좀 달라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4-8).”
어느 날 문득, 우연처럼 주님은 찾아오신다. 누구를 통해, 어떤 사건을 통해 주님은 말을 거신다. 갑작스런 질병이 또는 어떤 사건이 우리를 엄습할 때, 느닷없이 무슨 일이 또는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물을 좀 달라.’ 그럼 우리의 평범했던 일상이 흔들린다. 시간을 달라, 건강을 좀 달라, 네 물질을 좀 달라, 그리하여 아무 탈 없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던 우물곁은 혼란스러워진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기껏 잘 지내던 친구와 혹은 동료에게서.
-일상에 길들여진 학습된 무기력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9).”
우리는 그럴 때 상식적으로 접근한다. 이성적으로 따진다. ‘어찌하여, 나에게’ 하는 것이다.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왜 하필 나에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우리는 순식간에 혼란을 겪는다. 잘 길들여지고 매일 반복되던 일상은 당연히 반기를 든다. 운을 따지고 재수를 논하며 ‘어찌하여 나에게’ 하면서 발뺌한다.
-어떻게 알고 있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그 물이 그 물이 아닌 것을, 그 돈이 그 돈이 아닌 것을, 그 생명이 그 생명이 아닌 것을, 느닷없는 사건과 상황은 또한 난데없는 사고와 난감한 처지는 그 너머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되묻는다. 그 건강이 누구의 것인지? 그 인생이 누구의 것인지? 그 물질의 출처가 어디에서부터였는지. “네가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우리는 달리 구하였을 것이다. 물보다 그 근원되는 생수를, 돈보다 더 값진 보물을, 생명보다 더 귀한 영생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②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현실도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11).”
이는 몸에 밴 회피다. 그럴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하면서 현실을 부정한다. 마치 새삼스러운 듯. 하필 왜 나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는가! 변명처럼 들리겠으나, 사실인 현실을 강조함으로 당면한 현실을 모면하려 드는 것이다.
-지식을 동원하여 대응함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2).”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과 지식을 동원한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늘 답습해온 이론을 가지고 ‘물을 좀 달라’ 하는 현실을 향해 반문하는 것이다. 이 우물은 우리가 조상 대대로 의지하고 살아왔던, 윤리와 도덕이다. 그보다 그 근원적인 것이 있다니, 대체 그럼 당신이 우리의 조상보다 더 큰가? 나름 운동도 열심히 했고 성실하게 살았으며 선을 이루고 남에게 해코지 않고 살아왔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③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
영생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아는 듯 모르는 듯 늘 생소하다. 관심이 많은 듯 없는 듯 흥미로울 뿐이다. 그런데 주님의 관심은 영생뿐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허상을 맞닥뜨리게 하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오늘을 허덕이며 내일을 꿈꾼다. 노후대책을 위해 오늘을 죽어라 산다. 살만하다 싶을 때 덜컥, 철 들자 노망인 세상에서.
주의 관심은 영생이시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 잘고 좋은 사회를 건설하고 훌륭한 국가를 세워가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으시다. 이에 따른 모든 귀결은 영생이다.
-우리는 삶에서 희망함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에 대하여 우리는 현실에 국한지어 생각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우리의 감추어진 문제를 건드리신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 다시 말해 네가 그처럼 의지하고 보람을 느끼는, 그 실체를 보여 봐라! 그러자,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17).” 땅도 있고 집도 있고 저축해둔 예금도 있지만, 일궈 온 삶의 수고가 ‘없나이다.’ 하는 덧없음으로 함축된다.
정작 돌아보면 모든 게 덧없다. 그 의지의 대상이 허망함에 대하여,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애쓰며 수고하고 살아왔나? 사랑을 갈구하고 죽어라 하고 행복을 추구하느라 노력하였을 우리 삶은 가히 눈물겨웠다.
④ 종교적인 이해와 상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19-20).”
우리는 얼마나 영악한지 모른다. 순발력 있게 교활하다.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눈치 못 채게 외면한다. 그럴 때 흔히 쓰는 방식이 종교적인 견해다. 모두 다룰 수 없는 문제를 이상의 존재에게 갈구하는, 종교의 모호함에 기댄다. 주도권을 쥐려는 것이다. 나도 잘 안다는 견해로 종교성보다 숨기 좋은 도피처도 없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비로소 예배를 가르치신다.
첫째, 아버지께 예배할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여기다 저기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참 말들이 많다. 교단은 수백 개로 갈리고 교회는 부지기수며, 저마다의 이상과 가치를 운운하고 나름의 신앙을 구사하며, 여기로 저기로 사람들은 몰려다닌다. 나름은 보다 나은 예배를 구가하려는 수고다. 그런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둘째,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
곧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그런데 그게 어디 그런가? 삶의 위로를 얻고자 또는 마음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저마다의 신념은 믿음을 대신하고 나름의 경건한 마음은 예배를 대신한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켜 교회마다 부흥을 꾀하고, 사람들은 이에 부흥하듯 만족함을 얻으려 안간힘을 쓴다.
⑤ 곧 이때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3-24).”
은혜의 모든 기회는 이때다. 복음은 언제나 ‘지금’이다. 은혜는 항상 단회적이다. 예전의 체험으로도 아니고 앞으로의 소망으로도 아니다.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거하는 일, 그건 늘, 당장, 지금의 ‘이때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런데 우리는 항변한다.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 어딨어? 어떻게 성경대로 살아? 나름의 최선을 다할 뿐이야! 하고 말하는 우리에게 성경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때다.’ 이를 듣고 언제나 둘로 나뉜다. 여전히 자신의 주도권을 행사하며 다만 하나님께 향한 마음은 우리의 삶을 이롭게 하는 정도에서 활용하려는 이와 더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나를 주도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온유하여 다만 주를 믿음으로 박해를 감수한다. 이를 예수님은 ‘팔복’의 교훈으로 응축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팔복 위에 세우셨다.
기어이 나중으로 미루는 우리처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 머뭇거리고 있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26).”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우호적인 것에 대하여, 그 과도한 관심과 급기야 자기숭배의 나날들을 살고 있는 이때에 말씀은 예배를 일깨우신다. ‘곧 이때라.’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오나니,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아찔하다.
2. 서른여덟 해 된 병자
-삶은 다양하고 우여곡절은 넘쳐나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5:1-4).”
우리는 모두 베데스데라 하는 못에 모여 산다. 혹시나, 하는 기대와 설마, 하는 안이함으로 다 그렇지 뭐, 하는 자기합리에 절어 살다보니 어쩌다 ‘서른여덟 해’의 긴 시간을 병자로 살아오면서도 익숙하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5).” 그게 나다. 우리 자신이다.
①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물으신다. 실패로 또는 병마로 혹은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으로, 기어이 우리는 끔찍한 일을 당하기 전까지 긴긴 시간을 ‘설마’와 ‘혹시나’로 살아간다. 어느 통계에서 보니 65세 이전에 죽는 경우 70%는 청소년기에 생긴 그릇된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출생아의 40%는 혼전 임신으로 태어나고, 결혼한 이의 50%는 이혼을 한다. ‘다 그렇지 뭐!’ 하는 학습된 우리의 질병은 기어이 자기 일로 터지기 전까지 안이하게 산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의 질문은 좀 당혹스럽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 불편함을 안다는 전제에서 이 질문도 성립된다. ‘회개하라.’ 할 때 자신이 죄인인 걸 알지 못하면 이 말은 그저 우스갯소리가 된다. 예수님의 물음에 귀 기울여보자. 정말 ‘네가 낫고자 하느냐?’
② 학습된 무기력 증상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환경을 탓하고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남과 비교하며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했더라면’, 하는 가정법적인 질문들에 사로잡혀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즉 그런 사람이 있었더라면. 운이 따르기를 바랄 뿐 그런데도 ‘물이 움직일 때에’ 운만 좋다면. 신세한탄이나 자기 연민에 빠져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③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
부르심의 명료한 음성이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거나 없애주시지 않는다. 다만 다를 바 없는 문제 앞에서 주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의 태도를 달라졌다. 전에 추구하던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이를 예수님은 이렇게도 설명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늘 보면 뭐 그리 바쁜지. 늘 경황이 없다. 마음은 부산하고, 여기저기 정신이 팔려 둘려볼 데가 왜 그리 많은지. 그런 가운데 짬을 내서 교회를 가야하고, 숨 좀 돌리고 예배에 참예한다. 여유가 생겨야 주를 묵상하고, 늘 그러려니 우리는 ‘나중에’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벌써 서른여덟 해 된 병자다. 누가복음 12장에서 한 부자에게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20).”
오늘 본문에도 본질에서 벗어나, 원칙을 들먹이는 사람들과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9-10).” 누군지,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11-13).”
④ 이는 예수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14-15).”
은혜란 주님의 전적인 은총이다. 그 주님은, ‘더 심한 것이 생기기 전에’ 젖어 있는 타성에서 벗어나라 하신다. ‘서른여덟 해’다. 긴 시간을 보냈다. 늘 그래왔던 문제다. 다들 그러려니 하였다. 마비된 세월이다. ‘이는 예수라.’ 네가 낫고자 하느냐?
나오는 말
① 환경을 핑계 삼고, ② 신세를 한탄하며, ③ 남과 비교하고, ④ ~하다면 기회가 있을 거라 여기면서! 벌써 서른여덟 해 세월만 축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별 수 없는 일이겠으나, 이는 예수라. 미적거리지 말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현실적으로 말이 되겠나?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17).” 이 엉뚱한 원리가 복음이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곧 하나님이 일하신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결국 다 죽을 죄인이다. 여전히 ‘서른여덟 해 병자’로 있으면서 언제까지 ‘사마리아 여자’처럼 구구한 변명만 늘어놓을 것인가?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그러므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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