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9 주일
로마서 1:18-32
하나님의 진노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1: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스스로 너그러운 듯 폭넓게 모든 걸 수용할 수 있는 것처럼 군다. 아이는 스스로를 양성애자 같다고 하고, 동성애에도 끌림과 홀림을 관대함으로 대할 것처럼 남과 다르다는 것을 부추겨 생각하려는 듯하였다. 뭔가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나은 듯 그것으로 하나님 없이도, 성경을 부정하면서도 선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여겼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5).”
즉 우리의 잘못된 허용과 관용이 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데서 비롯되는 자가당착인 것을 오늘 본문은 일깨우고 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그것으로 거역함의 정도가 허용의 범주를 모호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착하고 의롭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주장과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들이 열심히 기도하면 저가 또한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소리들도 한다. 이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22).”서 하는 소리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일이다.
1. 하나님의 진노는 어떤 사람에게 임하는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8-19).”
첫째,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다.
둘째, 저들은 경건하지 않다.
셋째,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
넷째, 하나님을 알만하나 모르는 채 산다.
먼저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는 자기 신념이 우선인 경우다. 그래서 자신도 진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자식도 친구도 이웃도 못하게 하는 자들이다. 그만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특징이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그 특징은 뚜렷하다. 자기 사랑함으로 돈을 사랑한다. 꾸미고 치장하는 데 아까워하지 않는다. 누리고 소유하는데 거침이 없다. 이를 숨기지 않고 그런 자신을 자랑한다. 내세우고 드러내길 좋아한다. 현대 사회는 과시욕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사 3:16).”
저는 교만하다. 스스로 잘났다. 그래서 남을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한다. 감사할 줄 모르고 거룩하지 않다. 무정하다. 그런 이들은 그 속에 스스로의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 가난이 한이어서, 어릴 적에 뭐가 어때서, 하는 따위로 무장한 마음은 남을 모방하고 절제하지 못하는 자신을 두둔한다. 저는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선하면 바보 취급을 받는 사회다. 그런 이가 배신을 하고 조급해 한다. 자기를 자만하고 쾌락을 즐긴다. 저는 겉으로는 경건의 모양을 취하나 그 능력을 부인한다. 그 능력은 주의 것이다.
2.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9).”
첫째, 사람은 그 속에 모두 양심으로 가지고 있다.
둘째, 누구라도 자연의 광대함과 무궁함으로 자신을 작게 여기고 경탄할 줄 안다.
셋째, 그 속에서 남과 견주어서도 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자기 안에서 증거 하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산다. 아무리 악한 살인자도 가족은 위할 줄 안다. 무지막지한 갱단 영화를 봐도 저들이 서로 돌보고 위하는 ‘패밀리 정신’은 도드라져 강조된다. 양심이 없는 사람도 사람은 사람이다. 기계가 아니다. 짐승 같아도 사람이지 짐승이지 않다. 그래서 누구나 자책한다. 자책함으로 구원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고사를 지내고 무슨 산신제를 거행한다. 문명화 됐든 아직 원시적이든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도 스스로 괴로워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두려움과 자책은 어떤 미지의 힘을 의지한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처럼 스스로도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이다. 이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 아무도 핑계할 수 없는 앎으로 다양한 신을 찾고 미신을 도모한다.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잠 20:11).” 결코 어려서 모르는 게 아니다. 어른이 돼서도 마찬가지다.
3. 정말 모르고 그러는 것일까?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첫째, 모른다는 것은, 고의적인 것이다.
둘째,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다.
셋째, 미련하여 마음이 어두워졌다.
넷째,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긴다.
다섯째, 피조물을 조물주로 삼는다.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은 한 마디로 지극히 고의적인 외면이다. 알면서도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만 자신을 먼저, 더, 온통 영화롭게 한다. 감사하기 싫어한다. 감사는 그만큼 마음을 내어줘야 하는 일이다. 그러느니 허망한 데 마음을 두고 기울어져 간다. 대놓고 ‘멍때리기’를 하고 재미로, 장난으로, 농담 삼아 조물주 하나님을 비하하고 피조물 사람을 우선하여, 점점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그렇다. 미련한 자는 그 토한 걸 도로 먹는 개 같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 앞에 절한다.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다를 바 없다. 소원을 빌고 자신의 앞날을 점친다. 운수를 따지고 재수를 바란다.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롭게 여겨 어리석어졌다.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만 많다. 말만 무성하다. 뭐라 해도 이는 실수가 아니고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고의적이다. 일부러 그런다. 자기 자신의 선택에 따른 일이다. 별 수 없다. 이를 하나님도 강제하시지 않는다. 우리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란 이처럼 준엄한 것이다.
4. 내버려두심의 결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4-27).”
첫째,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함.
둘째,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경배하고 섬김.
셋째, 여자를 순리가 아닌 역리로 취함.
넷째, 음욕이 불일 듯 일어 동성애를 행함.
다섯째, 이에 따른 보응을 받음.
인격적인 관계란 그만큼 엄연한 책임이 따른다. 고의적인 부정과 악의적인 죄에 대해서는 ‘버려두심으로’ 그 보응을 따라 살게 하신다. 이에 서로의 몸을 욕되게 탐한다. 쾌락주의에 따른 성의 상품화는 이제 보편적인 게 되었다. 그리고 진리를 거짓된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경배한다. 단적인 예로 돈을 사랑한다. 이보다 더한 우상은 없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돈을 사랑함으로 믿음을 떠나게 된다.
또한 오늘 날 그 실체가 드러나는 ‘미투 운동’의 경우처럼 여자를 순리로 대하지 못하고 역리로 대한다. 쾌락의 대상으로, 성적인 노리개로 삼는 것이다. 이는 구구한 역사를 거쳐 자행되어온 일이다. 그렇듯 음욕은 더욱 불일 듯 일어 여러 변태적인 소행은 급기야 동성애적인 자기애로 나타난다. 이를 마치 성소수자로 분류하여 소외되는 계층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이어서 소아성애자나 성도착증에까지 이를 질환으로 보는 인식이 팽배하다.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에 동물과의 교접은 물론 반려견에게도 세례를 주고, 동물과의 정식적인 혼인신고도 법적으로 허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마치 선진화된 문명 또는 의식이 깨어있는 문화로 여기는 것 같은데, 이는 태곳적 아주 오래 전부터 비화밀교처럼 성행하던 일이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엄연하다. 이는 모두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기 싫어하면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동성애는 죄악이다. 이성애도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창조 질서를 훼손하는 모든 것은 죄다. 나아가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자기애는 죄다. 돈을 사랑함이 죄고 세상을 하나님과 같이 섬기는 일이 죄다. 죽으면 다시 태어나 산다는 얼빠진 소리도 죄다. 사후에는 각각 영벌과 영생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이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마치 우리는 동성애자만을 판단하려 든다. 동시에 이성애자인 우리도 죄인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우리는 구원이 필요하다. 구원의 핵심은 믿음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를 구할 수 없다. 남을 대신 구원할 수도 없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를 창조하신 이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재창조하셔야 한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이로써 우리는 거듭남으로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그러므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그 증거로써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스스로 죄인 됨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애통해하며 주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다.
5. 상실한 마음의 특징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8-31).”
상실한 마음의 특징은 합당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합당함이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심으로 주어진 삶에 정직과 성실함으로 사는 것인데, 그 기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신 6:18).” 우리의 문명과 교육이 기준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선행과 의가 표준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친히 이 땅에 오시고 죽어주시기까지 한 예수께서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다.
이에 상실한 마음에서 돌이킬 수 있다. 그 마음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이다. 저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것이다. 이를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게 누구인가?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성자이든 불한당이든 우리는 모두 이와 같다.
나오는 말
이에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한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이를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 사람으로 살면서 우리의 처지와 연약함을 손수 체험하신 주님이 우리를 동정하신다. 저는 죄가 없으면서도 죄인과 똑같이 죽으셨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곧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와 같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 바 되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이를 알게 하신다. 이에 하나님의 진노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가 되어 우리가 죽은 뒤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구원은 없다. 구원을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거절하든, 그래서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기 싫음으로 살아가든, 그 하나님의 진노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가 되셨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계 6:16).” 아무도 몰랐다고 말할 수 없다. 실수였다고 핑계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모면할 수 없다. 훗날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그러므로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3-4).” 조심하라. 깨어있으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그러므로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 13:33).” 이에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맡기시는 아이들을 마음에 두고, 또한 주어진 상황에서 온전히 주를 바라며,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아멘.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3:19-31 / 하나님의 한 의 (0) | 2018.05.18 |
---|---|
로마서 2:17-21 / 의지하며 자랑하며 (0) | 2018.05.04 |
요 4:1-26, 5:1-18 / 사마리아 여자와 서른여덟 해 된 병자 (0) | 2018.04.20 |
마가복음 9:38-50 /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0) | 2018.04.06 |
마가복음 4:14-20 / 서로 다른 네 개의 마음 (0) | 2018.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