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전봉석 2018. 4. 8. 07:16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1-52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시편 124:6

 

 

 

나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주를 따른다는 것은 어슬렁거리는 일이 아니다. 멀찍이 서서 가는 것도 아니며, 구경꾼처럼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가는 일도 아니다. 돌아보면 나를 내버려두어 저들의 이에 씹히게 하셨어도 될 일이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살아났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에 대한 애착이 지극하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나의 영혼이 올무에서 벗어났음을 찬송한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 나의 결단이나 판단으로 이루어낸 게 아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8).” 안이함으로 도리어 봉변을 당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 14:51-52).”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시 124:6).” 그런 지경에 이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막 14:54).” 구경꾼처럼 굴어서야 어디! 하긴 그 열심이 자신을 삼키는 경우도 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21).”

 

차라리 나지 않으면 좋았을 경우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확신을 따라서는 어림도 없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46).” 닥치기 전엔 모른다. 나는 늘 두려운 게 이 모든 이야기가 나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누구보다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어서 말이다. 그러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38).” 오늘 말씀은 나를 일깨우신다.

 

아이가 오후에나 왔다. 이런저런 사정과 변명은 늘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아이의 몫이다. 열한 시에 와야 할 아이가 세 시가 다 돼 왔다. 뭐라 나무랄 게 아닌 것은 저도 자신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정색하고 꾸짖어봐야 깨달아 알지 못한다. 어르고 달래는 수밖에. 이래저래 글을 써보기를 권하면서 넌지시 나의 기도내용을 알려주었다. 난 네가 언니랑 친해지길 바란다. 어느 날 언니가 너를 따라 글방에 오길 바라고, 이번 중간고사 끝나고 잠깐씩이나마 같이 성경공부를 하여 가을에는 네가 학습세례를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의 말에 곁에 있던 아내도 풋, 하고 웃었다. 아이는 세례가 뭔지도 모른다. 언니와는 말 한 마디 섞지 않고 산지 오래 되었다. 그 부모를 돌이켜 다시 합하게 하는 것까지야, 아이에게 내 안에 두시는 소원을 다 말해줄 수는 없었다. 참 감사하고 다행인 것은 아이가 이제는 제법 대꾸도 하고 웃어주기도 하며 같이 어울릴 정도로 마음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나는 이처럼 배짱인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이제 확신한다. 내 안에 이와 같은 생각과 마음을 두시는 이가 그것으로 주를 바라며 구하고 기도하게 하신다. 아이가 할 수 없는 기도를 대신하게 하시는 것이다. 저가 구하지 못하는 것을 놓고 우리에게 대신 기도하게 하시려고, 오늘 저 아이를 내 안에 가득 채우시는 것이다. 이를 확신한다.

 

얼마나 화딱지 나는 일인가? 오전 열한 시에 와야 할 아이가 뜬금없이 오후 세 시가 다 돼 왔다. 나는 아이와 점심으로 뭘 먹어야지, 무슨 말을 해야지, 어떤 걸 하게 해야지, 하고 궁리하고 있던 게 보기 좋게 산산조각이 났다. 하나님은 종종 일부러 이러신다. 아이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문제다. 이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나의 문제다. 결국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다. 아이는 그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일정이 꼬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아이가 싫지 않게 하시는 것은 은혜다.

 

사랑이다. 주의 마음인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어떤 것일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6-8).” 날 위해서 말이다. 하물며 이제 와서 나는 아이를 싫어할 수 있겠나?

 

내 안에 두시는 사랑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두려워할 거 없다. 주는 나를 꾸짖으신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주께 향한 우리의 마음은 터무니없는 게 아니다. 실체가 분명하다. 그 대상이 명확한 것이다. 오해할 수 없게 만드신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성령으로 하게 하신다. 문득 아이와 함께 내려오면서 내 안을 가득 채우게 하신 마음이 희한하였다. 아이가 돌아가고 아내는 내 신발과 봄 잠바를 하나 사준다며 마트로 갔다. 그러는 동안 다른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세 아이 가운데 두 아이 부모가 이혼을 했다. 그나마 한 아이는 아버지의 폭력적인 억압으로 늘 죽었으면 하고 바란다. 거침없이 아이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다.

 

느닷없이 아내는 한 아이 이름을 대며, 더 사랑해야겠어! 하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마음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왜 우리가 저 아이들을 더 사랑으로 대해야겠다고 하게 하시나? 그 마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렇지.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1).”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나타내려 하심이다.

 

드러내어 밝히 행하는 삶.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7).” 무던히 그리 사귀는 것뿐이다. 우리 곁에 두시는 동안, 우리는 어떤 성과를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주시는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뿐이다. 지나면 또 허상처럼 사라질 수고요 노력이었다 해도!

 

그리할 수 있는 마음은 내 것이 아닌 것이다. 동시에 이 일은 힘쓰고 삼가는 일이다. 먼저는 날마다 주의 안식에 들어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순종과 순종 아닌 것을 주께서 경계하신다. 삼가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막 13:23).” 이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22).”

 

멀찍이 서서, 안이하게 홑이불을 걸치고 어슬렁거리듯 주를 따를 문제가 아니다. 그랬다가는 영락없다. 오늘 본문은 이를 통해 주의를 주신다. 미혹하는 영이 도처에 깔렸다. 마트를 다녀오는 길에서도 누가 설문조사를 하듯 몇몇을 꾀어 저들 교회로 부른다. 젊은 여자아이 둘이다. 예쁘게 생겼다. 쑥스러워하듯 남자아이들은 이에 응대하며 설문지에 뭐라 기록하며 그 말을 듣는다. 슬그머니 곁에 다가가자 어깨로 숨기듯 여자 둘은 등으로 막았다. 돌아서 오면서도 내심 답답하였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33).”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리 곁에 보내시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누구들처럼 나서서 전투적으로 세상을 구원할 듯 굴 수는 없다. 막강한 돈을 미모를 그럴듯한 화술을 흥미를 제공할 수도 없다. 내가 가진 것은 없으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내 소원은 네가 언니랑 친해지는 거야. 말문이 트여서 너로 인해 언니가 교회로 오는 것이야. 나는 너와 성경공부를 해서 가을에는 네가 학습세례를 받고 내년 부활절에는 세례교인이 되는 거야.

 

어디서 이런 소원이 내 안에 들어찼는지 나는 모른다. 세 아이 가운데 두 아이의 부모가 모두 이혼을 했었다는 것에 아내는 충격을 받았는지 돌아오면서도 몇 번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더 잘해줘야겠어! 하는 말을 되풀이 하였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수로 잘할 수 있을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러할 때,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4).” 말씀이 소원하시는 바, 내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시는 이가 따로 있었으니!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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