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4-1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5-6
완악함이다. 다른 말로는 어찌 표현이 어렵다. 도무지 믿으려하지 않는다. 그러게,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아플 겨를이 없이, 진통효과가 있는 낮은 즐거움이 너무 많았다. 아이와 통화를 하는 동안 뭐라 이르고 말해주어야 할지, 나는 답답함으로 주의 이름만 되뇌었다. 통신비가 밀려 전화는 정지된 상태였다. 무력감에 시달리며 자취방에만 드러누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정신과 약은 늘어갔다.
주소를 묻고 성경을 보내었다. 싫다는 걸 그리하였다. 억지로라도 읽어라. 뭐라도 자꾸 써라. 움직여서 어디 산책이라도 다녀라. 나의 말은 힘없이 풀풀 날리는 먼지 같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전화상으로라도 기도를 하자고 했다. 아이는 와이파이가 되는 카페에 혼자 나와 있다고 하였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주가 아니시면 어찌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저의 완악함을 돌이킬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아이와 통화를 하면 꼭 또 떠오르는 아이가 있어 내친김에 그 아이와도 통화를 하였다. 졸업 후 어디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시들하게 지낸다는 말을 듣고 난 뒤 한참 되었다. 서울시에서 하는 무슨 전시공연 기획 일에서 인턴으로 일하는데 140을 받는다고 했다. 시큰둥하니 남의 말 하듯 죽지 못해 사는 아이처럼 말하였다. 마침 일 끝나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며 통화가 되었다. 서울에 있는 선생을 소개하고 찾아뵈면 어디 일자리를 구해줄 것이라 일렀다. 가까운 교회라도 가라. 기도할게 힘내라.
나야말로 시무룩하니 어떤 우울감이 밀려왔다. 모처럼 선생에게 먼저 전화를 넣었다. 안부를 묻고 아이가 찾아갔던 일과 어디 일자리가 있는지 부탁을 하였다. 그리 마음이 쓰이는 일에 대하여는 나도 모르겠다. 때론 야속하고 한심하기만 하다가도 그래서 꾸짖어 뭐라 나무라다가도 여태도 같이 하게 하시는 주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우리는 혼이 좀 나야 한다.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그럼 그냥 내버려두셔도 될 거였는데,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뜻을 다시금 되새긴다. 안 보면 그만이고 서로 없던 일로 하면 될 사람인데도 그게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생인손처럼 자꾸 아파서 온 몸이 주체할 수 없는 고통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라, 듣고 되뇌며 주 앞에 아뢰는 것밖에 달리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싫은데, 어쩔 땐 너무 싫은데, 그래서 모른 체 하고 싶은데, 그럼에도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로 세우심을 받은 일이다. 이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하는 말씀을 붙드는 수밖에. 내 안에 두시고 견고하게 세워 가시는 주의 말씀만을 의지하는 길이었다. ‘빚진 자’로 표현한 바울사도의 표현이 같은 의미일까?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주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빚이다. 본래 저들보다 더 못한 한심하기 그지없는 위인이었는데, 거저 은혜를 받아 믿음을 얻는 것이다. 그게 성도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 이 땅에서, 말도 안 되는 군상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일이라니!
돌아보면 그 모든 일이 아찔하다. 내가 아이를 나무라고 뭐라 꾸짖다가도 어느새 스물다섯, 스물여섯, 한참 그러고도 남을 나이였지 않았나? 죽어 마땅한 때였다. 선생과 함께 어울리고 다닐 때, 또는 일자리를 구하느라 이 사람 저 사람과 어울려 정신없이 돌아칠 때, 그래 나는 더했다. 한심하고 처량하고 답답하기가 나야말로 더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다. 그런 나를 부르심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는 성도로 세우신 것이다.
성도! 이 놀라운 지위를 어찌 감당할까?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 더는 그게 아닌 걸 알면 알수록 아이들이 그 자리에 처한 상황을 외면하고 두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성도란, 더는 죽은 사람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리하여 새로 산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5-26).”
가슴이 답답한 게, 숨을 몰아쉬며 주 앞에 선다. 오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라. 나의 신경쇠약으로 나는 주밖에 의지할 수 없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9-10).” 어렴풋이나마 그 심정이겠구나, 가늠해본다. 돌이켜 아이들이 주를 바라고 구할 수만 있다면.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있는 일.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저들에게 나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고 있었다. 내가 병들어 요즘은 어떤지, 선생은 안쓰러운 듯 물었다. 나는 저의 영혼을 두고 생각하고 저는 이 땅에서의 나의 살림살이를 두고 염려하였다. 말씀은 더욱 이르신다. 알고 있는 바를 더욱 확실하게 하시려고,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3-4).”
안다고 짐작하는 정도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성도에 걸맞은 성품이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사는 정도의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를 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1).” 내가 돌아보아 나의 죄를 인식하면 할수록 오늘의 내게 더하신 은혜가 크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더는 죄에 대하여 죽이신다.
좋은 일거리를 운운하고 또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듯 맴도는 아이의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3).” 죽어야 한다. 죽지 않고는 부활의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
이를 어찌 말로다 설명한다고 될 일인가? 안 되겠다 싶어 덮어놓고 기도하자고 하였다. 몇 번 그래 봐서 그런가? 녀석은 기도하자, 기도할게? 하고 말하자 순순히 네! 하고 대답을 하였다. 나는 아이에게 말로다 할 수 없던 설명과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들을 주께 아뢰었다. 그래도 감사한 건 녀석이 기도 끝에 아멘! 하고 응하는 것이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0-11).”
죽어야 할 것과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하여. 아이의 자살충동에 대하여는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신경을 쓰면 가슴만 답답하다. 혼자서 ‘양치기 소년’이 된 것 같은 아이의 되풀이 되는 말이 나는 두렵다. ‘늑대가 나타났어요.’ 하고 소리쳐도 더는 돌아보는 사람조차 없고, 저의 부모들도 이제는 기진하여 손을 놓은 상태였다. 부디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가정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그런저런 상황을 아내에게 말해주었다. 아내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역시, 어느 아이는 그 부모가 이혼한 거였어! 하며 혀를 찼다. 이상하다 싶었다. 아이엄마는 유난히 폭압적이었고 그 외조모는 아이를 구박하듯 쥐고 흔들어댔다. 아이는 두 여자가 안 됐다. 그래서 반항하지 않는다. 때리면 맞고 부당하게 요구하는 것도 다 들어준다. 한 번은 핸드폰 액정이 깨졌다며, 글방에 있는 아이를 불러냈다. 그 목소리가 하도 쩌렁쩌렁하여 민망하였다. 아이의 체념은 효도가 아니다. 미안하고 안쓰러운 미움이다.
‘엄마가 제일 불쌍하고 싫다.’ 데자뷰처럼 그 표현은 십여 년 전, 지금은 스물여섯 다 큰 계집아이가 했던 소리다. 그래서 지금은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동거하며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서울을 떠돌고 있는 것과 중첩되었다. 어쩐다? 아내는 이제 말문이 트였으니 조만간 주일에 교회로 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막무가내로 아이를 집에 처박아두는 경우라, 어찌 그 아이를 나오게 할까? 우린 할 수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정말이지 농담 같은 사연들이 늘어가는 것 같다. 마치 거짓말로 과장하고 꾸며내는 얘기처럼 말이다.
일부러 그러신다. 그런 아이들만 붙이신다. 아니면 전에는 안 보이던 모습이 이제는 크게 눈에 띄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아이들 공부를 봐주고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다. 밥벌이를 위한 일에서 벗어나 우리도 모르게 자꾸 그 영혼에 개입한다. 저들 부모가 이혼을 했든 다른 남자를 집에 들여 살든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었나? 아이가 폭압적인 부모에게 시달리든 그런저런 애들과 어울리든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었나? 그런데 마치 꾸며낸 이야기처럼 정말이지 자꾸 그런 아이들만 붙이신다.
곁에 두시고 생각나게 하신다. 생인손처럼 아파서 온 몸이 못 견디겠다. 꼴랑 그 손톱 끝에 티눈 같은 것으로 말이다. 우리는 둘러 앉아 말씀을 읽고 돌아가며 기도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우리도 다를 바 없었는데 그럼에도 주께서 이와 같은 은혜를 맡기신 게 아닌가? 딸애가 말했다. 감사한 줄 알아? 우리 가정이 얼마나 복을 받았어?
그 말이 맞다. 내가 저 아이를 잘 키운 게 아니었다. 주가 아니셨다면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을까?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21-22).” 그러므로 이제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것.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성도라는 이 값진 은혜 앞에 우리는 언제나 빚진 자였다. 내가 저 아이를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마음이 쓸려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갈 때,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라. 그래, 그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말씀 붙들고 ‘아멘’이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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