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마가복음 15:13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편 125:1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과의 구별이 필요한 시기다. 너무 모호하다. 막연하여서 갈팡질팡 할 때가 많다. 마음은 저 혼자 요란하다. 군중심리란 그런 것이다. 덩달아 날뛰는 마음으로는 주를 의지할 수 없다. 흔들리지 않는 평안, 가만히 주만 바랄 수 있는 평강,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아이들로 내 마음은 쥐락펴락한다. 무슨 라면을 같이 끓여먹자고 해서 사다놓은 지, 몇 주째다. 한 아이가 이제 막 생리를 시작한다고 해서 서로 축하하며 응원한다고 케이크를 사려고 했던 게 또 우습게 됐다. 안 믿는 가정에서 홀로 믿음으로 자란다는 게 얼마나 각박한 일인지, 늘 안쓰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그래도 우리 중3 아이가 따라와 주고 있으니 그것으로도 고맙고 감사한 일이기는 하였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마음이다.
그래, 그렇지. 다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6-17).” 내 안에 나도 알 수 없는 믿음이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의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어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게 없어 나는 늘 휘청거린다.
이렇게 하려고 하면 저렇고, 저렇게 해야 하나 싶으면 이렇다. 아이들 마음은 어찌 붙들 수 없는 봄바람만 같아서 어찌 살랑거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리의 친절이 또는 관심이 저들에게는 우습게도 여겨질 것이다. 죄와 동시에 복음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결코 버려두지 않으신다. 어쩌다 구원이 아니다. 미리 예정하신 일이며 택하신 백성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이루시는 일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승리할 것을 다 아시고 계신 결과다. 이는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22:18).” 오고 안 오고, 뭔가 변화가 있고 없고, 나는 항상 당장의 발밑의 일로 전전긍긍하는 정도이겠으나 성경은 이 모든 일이 오래 전에 미리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확히 하신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인이라 나는 다만 주를 바랄 따름이다. 이래서 못 오고, 저래서 못 온대 하는 말을 전해들을 때의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그것으로 속상해하는 일이 또한 소중하기도 한 것이다.
곧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그 문은 좁고 협착하여 여럿이 우르르 들어가지도 못할 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이 귀한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는 일, 아이 하나를 두고 몸살을 앓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같이 점심을 먹고 올라와 아내는 아이의 뒤처진 공부를 도와주었고 딸애는 교육방송을 들었다. 이래저래 생각은 저 혼자 분주하였으나,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그러지 말자. 묵묵히 주만 보고 가자. 아이들 뭐, 다 그런 게 군중들이어서 우르르 몰려왔다가 우르르 몰려가기도 하는 것이어서!
오죽하니 그 악랄한 빌라도도 어리둥절할 일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막 15:14).” 사람들 안에 속해 있을 때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그 속절없음으로 인하여, 가히 기준을 분명히 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그럴 수 있는 기준은 주께 속한 자여서이다. 저 아이가 또 우리를 애태우는 아이들이 실은 주께서 그리 사랑하시는 주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주가 사랑하시는 데 따른 마음이어서 나도 내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헛된 데 소망을 두지 말자. 그저 다만 하나님께 마음을 둠으로 선을 행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을 보고는 어림없다. 저를 대하는 마음은 주로 인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내가 살 길이다. 달리 길이 없다. 봉사 차원의 일이 아니다. 선을 도모하고 아이들을 격려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그런즉.’ 하나님만 바람으로 다음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부사 ‘그런즉’의 다음 문장은 뚜렷하였다. 아이들로 실망하는 마음으로는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다. 다시 마음을 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는 주의 마음으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일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수밖에.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 나는 자꾸 거꾸로 접근해서 탈이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멀고, 마음으로는 알겠는데 대함으로는 싱겁기만 하여. 그런즉의 타당한 근거로써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 주께 맡긴다는 것은 그런즉 먼저 주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었다.
누가 왔으면. 저 아이는 어떤가. 요즘은 잘 지내는지. 어쩜 이렇게 나아오지 못하는지. 마음은 들썽거려 저 혼자 씰룩대기 일쑤지만,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그렇지. 나는 아는 만큼 바라고 바라는 만큼 평강하였다. 성장한다는 일은 실제 눈에 띄지 않는 일이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내 안에 이는 이런저런 마음이야 저 혼자 그러다 말 것이고, 그럼에도 이처럼 또 묵묵히 주어진 시간에 그 곳에 앉아 늘 변함없이 주를 바라며 말씀을 붙들 수 있는 일.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시 139:1).” 주가 아신다. 무던할 수 있는 것은 누구에 의한 인정도 그에 따른 가시적인 성과도 아니었다. 사람은 또 그러다말기 일쑤고 어렵사리 뭐가 좀 되려는가, 싶다가도 싱겁기 그지없는 것.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막 15:13).” 아, 이 배반의 땅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묵묵히 주를 의지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긴 세월, 아무런 조짐도 변화도 누가 동조하지도 않는 일을 무려 120년이나 감행하였던 노아의 실천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말씀만 붙들고 나아갔던 아브라함의 걸음으로. 승산이 없는 사명을 지팡이 하나만 들고 마주하였던 모세의 무모함으로. 앞서 번번이 수렁으로 굴러 떨어지던 요셉의 실패에도.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새로 다시 주어지는 월요일 아침에 주가 이르신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현실이 아닌 현실을 사는 일이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내 안에 이는 여러 마음으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주가 나를 안위하심이라. 그러므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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