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8:16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1
그 빛,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이는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하심과 같다. 아이는 자꾸 주일에 나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며 종교를 운운하고 막연한 자신의 갈등을 말하였다. 심지어 자신에게는 불교가 더 맞는 것 같다는 소리도 했다. 나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 속이 훤히 보이는 듯해서 말이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에 대하여,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어떤 두려움이 또 속상함이 마음에 번졌다. 잘 견디면서 그래도 같이 가자. 그게 실은 학습된 무기력증이라는 것을 말해줄 수 없었다. 실은 공통적으로 나타는 게 미룬다. 마음은 굴뚝같으나 실천이 없다. 결국은 토한 걸 도로 주워 먹는 꼴이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그 빛, 복음이 아니고는 어찌 당해낼 재간이 없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인생의 그 덧없음에 대하여 나는 이제 열여섯 살 된 아이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 쩔쩔매었다.
모처럼 친구가 아이들 주라며 과자를 잔뜩 사 들고 왔다. 조카아이가 같이 왔으면 한다고, 조만간 아이를 데려오기 전에 먼저 들러야 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늘 같은 이야기라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러면서 본인은 또 주변인들도 여전하여서 그게 더 놀라웠다. 이상하다 싶어서 보면 그 아이의 문제에는 버젓이 하나님을 떠난 부모들이 있었다. 더 나은 게 없나? 하고 세상을 기웃거리며 이 일 저 일 가만 보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만 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때는 신자였고 주를 믿는다고 했던 이들이 술장사에 노래방에 요가에, 듣다보면 절로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안타까웠다. 그 상실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실 때,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 그러다 덜컥, 누군 또 이상한 사이비 종교에 빠져버리고. 어쩐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친구는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데면데면 자기 이야기를 하였고 그저 여러 관심사로 둘러쳐서 하나님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아이의 말이 오히려 정직했다. 나와는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 내가 뭐라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한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 마음을 닫으시는 이도 여시는 이도 주의 성령이신 것을 잘 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오늘 본문은 이를 일깨우신다. 그러니 내 눈에 보이고 내 귀에 들리는 이 말씀의 비밀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것인지. 이를 저들에게 알리고자 하여 애통함으로 저를 긍휼히 여기며, 어떻게 나로서는 감당이 안 돼 주 앞에 더욱 가난한 심령으로 온유하여지는 것이다.
계시의 말씀을 상식으로 이해하고 논리로 풀어내려하니 문제다. 무엇으로 아이를 설득할까? 오늘 말씀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 8:16).” 별 수 없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당장에 욕이 튀어나올 판이고, 아니꼽고 더러워서 더는 굽실거리듯 얼레고 달랠 마음이 생기지 않을 때. 이래봐야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 그냥 돌려보내고만 싶을 때. 그러든가 말든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여 될 대로 되라고 내팽개치고만 싶을 때.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그 밤에 나는 주의 성전에 선다. 아이를 보지 않고, 친구의 그런저런 정황에 눈길을 흘리지 않고, 그 너머 주께서 주도하시는 일,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것으로 송축할 일이다.
이는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도 안 되는 어둠 속에서 주의 영광을 보는 이 은혜의 진리 앞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또 다시, 해산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던 것인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내 안에서 싸우는 두 마음을 두고 나는 힘에 겨웠다. ‘맘대로 해!’ 하는 체념과 ‘그래도 같이 가자!’ 하고 곁을 내는 순응과.
나 혼자 싸워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 이 마음의 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8-10).” 그러니 이 비유의 말씀을 풀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해석이 안 되는 일들이었다. 이래야 하나? 싶으면 저건가 싶고, 저건가? 하고 돌아보려면 이것인 것 같아서.
안 되겠다. 내가 애를 봐선 안 된다. 친구와 친구의 사연만 귀 기울여선 안 된다. 저들이 처해있는 상황에 나 또한 함몰될 수 있다. 신기할 정도로 어김없었다. 하나님을 저버린 삶이어서 그 근본적인 문제가 뚜렷하였다. 본래부터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온 자연인들과는 다른 결을 띈다. 오히려 하나님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저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수그러지는 풀과 꽃과 나무와 같다. 뭐라 해도 바람에 나는 겨일 뿐이다.
어떤 원리,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끔찍하게도 깨져야 하는 일에 대하여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저들 자신의 완고함 때문이었다. 철저한 고집이다. 누가 뭐래도 듣지 않는 아집이다. 교도소에서 나와 검정고시라도 준비할 아이를 위해 호프집을 차렸다니! 도대체 이 비논리의 상식을 나는 어찌 깨부술 수가 없다. 가정을 등지고 아내와 처자식은 버려둔 채, 딸보다 어린아이의 사이비 종교에 관심을 두고 가까이 지낸다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럴 수 있겠나? 싶은 비상식의 영역에서 죄는 더 이상 죄 같지가 않다.
그래서 오빠가 성경을 본다나? 그 애가 그림을 그리고 말로 설명하는 걸 경청하기 위해! 어떻게 말을 듣다보면 내 안에 이는 어떤 안타까움이 또는 불안이 나를 엄습하여 불안을 더한다. 같이 나가 점심을 먹다가 결국 나는 밥도 못 먹고 안정제를 한 알 입에 물고 쫓기듯 얼른 교회로 돌아왔다. 우습지만 별 수 없었다. 친구라서 더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혼자 지하주차장에 들어가 아이들 과자를 들고 오며 저는 혀를 끌끌 찼다. 어쩌겠나. 저들 눈엔 내가 빙충맞을 뿐이다. 누가 누굴 대신하겠나.
나는 이 캄캄한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서 주를 송축한다. 암흑이다. 더듬거리며 살펴본들 그 사연이 그 사연이다. 중복되는 사건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의 생활이라는 것이, 아이는 정신과와 교도소를 전전긍긍하고 아이엄마는 이혼하고 아이를 핑계로 호프집을 차리고, 아이아빠는 뜬금없이 제 딸보다 나이어린 아이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으니. 서로가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그런 게’ 아니란다. 그런 게 대체 뭔지 나는 모르겠다.
일요일에 예배에 안 오면 안 되냐는 아이의 말에 나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까? 부담스러우면 오지 마, 하고 말해줘야 할지. 꾹 참고 와, 하고 말해줘야 할지. 성가시고 귀찮은 마음이 또는 아니꼽고 치사한 마음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일이어서, 안 보면 그만인데. 나도 그냥 마음을 접으면 될 일인데.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다른 더 좋은 수가 없다. 스스로 나는 내 마음조차 감당하기 힘들어서 안절부절못했다.
뭐라 한들! 뭐라 말해야 할까? 가만있어야 할까? 내버려둬야 하나? 어떻게 된 게 나는 할 말을 잃을수록 나를 볶아대는 조바심만 늘어, 내가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내게 담대함을 더하여주시기를. 기껏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훅, 하고 올라오는 어떤 불안이 또는 초조함에 결국 나는 점심도 못 먹고 창백해져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왜 그런지 내가 아나?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6).”
저가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산다는 일, 저에게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산다는 일.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이 비밀의 말씀을 붙들고 살면 나 혼자 어디 동떨어져 아무도 없는 곳, 변화산에서 살면 좋으련만 그게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기어이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로, 그 속에서 더듬거리는 친구를 또 아이를 곁에 붙이시는 것이니.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16).” 오늘 말씀은 그 사명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으나,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질고를 짊어지셨다. 조롱의 대상이었고 배고픔의 연속이었으며 배신과 음모와 음해는 말할 것도 없고, 기어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이란 그저 무난하고 형통하여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일 거였다.
속 끓이고 애태워야 하는 게 내 일이라면,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이 밤이 너무 깊고 어둡다 해도, 그래서 주의 성전에 서 있는 종들아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2).” 왜냐하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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