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10:23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23
우리가 보는 것을 같이 볼 수 있는 눈이 복되다. 한 곳을 바라보고 묵묵히 나아갈 수 있는 마음으로 감사하다. 우리의 공든 탑은 무너진다. 마음을 두고 더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에게서 실망과 좌절은 크다. 요란하고 뭔가 그럴 듯한 것을 바라던 마음을 행해 주께서 이르신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나는 번번이 어떤 성과를 기대하느라 정작 지니고 있어야 하는 기쁨을 잃어버리곤 한다.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을 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것으로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음을 기뻐하려 들 때가 있다. 내게 있는 것으로 구제하고 심지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로 애쓰고 수고하였다는 데서 만족함을 구하는 일이라니!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어리둥절하다(고전 13:1-3). 나름 사랑으로 천사처럼 말을 하고 마음을 주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고 했던 것인데!
그럼 그럴수록 나는 벽에 부딪친다. 이제 좀 되겠거니, 하고 문을 열고 들어서려 하는데 또한 벽이다. 어쩌면 나의 감정이입이 문제였다. 이를 성경은 경고하고 계셨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어쩌면 내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그 이상을 자꾸 바라고 구하였던 것일까? 돌아서서 아이들이 내 욕을 하고 어떤 서운함만 토로하였다고 하니 뭐라 할 말을 잃었다.
마음은 어렵고 의기소침하여 더는 아이들 대하기가 지겨울 때, 이런!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또 새로운 남자아이들로 그 시간이 채워졌다. 슬퍼하거나 노여워하는 마음도 불순종이라, 하나님은 이에 더 이상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가 생각하였다. 속상하고 답답해야 겨를도 없이 다시 새로운 아이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며 가르치고 함께 해야 했다. 그냥 두자. 뭐라 애쓰지 말자. 내 안에 이는 마음은 여러 결이었으나 나는 무던할 수 있기를 놓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내가 저 아이들의 구원을 이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 그 소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 그러므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2:14).” 모두가 흡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주께서 조용히 이르신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 내가 바로 볼 때 그 보는 것을 함께 보는 눈은 복이 있다. 결론은 나다. 나를 향하신 주의 은혜가 크시다. 그 마음을 헤아려 알 때,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3).” 그래서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오늘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나는 내 분량에 맞게 주신 바 그 몫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억지로 알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알 수 없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주셔야 하는 일이지 내가 이루어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자꾸, 공든 탑은 무너진다. 애쓴다고 애쓰고 수고한다고 수고했던, 아이로부터의 외면이 크다.
우리를 보내시며 주가 이르신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 10:3).” 항상 위태로운 건 나 자신이었다. 묵묵히 또는 무던하게 이 일을 감당한다는 일은 실제 누구와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과의 문제였다. 아내의 염려처럼 나는 보면 늘 감정이입이 심하다. 적당한 거리를 둬야 하고 선을 긋고 마다해야 하는데 그게 조절이 안 된다. 늘 보면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실제 나는 분간을 잘 못한다. 그러니 기껏 잘해주다가도 제풀에 꺾여 실망하고 좌절하고 욕을 듣는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4, 5).” 준비해갈 게 없다. 쓸데없이 아무에게나 문안하지도 마라. 나는 얼마나 마음을 흘리곤 하는지 모른다. 평안을 빌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다.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6).” 그런 걸 극구 사양하는데도 안기려하니!
그러지 말자.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7).” 주는 대로 또 얻는 만큼 마땅히 여기자. 영접하거든 내 앞에 차려놓은 것을 먹고, 병자를 고치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말하자.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10-11).”
아이들이라고 순수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영악하고 잔망스럽다. 다시 말해 얼마나 얄미운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좀 시무룩하였고 의기소침할 거였는데, 하나님은 그럴 새도 없이 새로운 남자아이들로 그 자리를 채우셨다. 나로 하여금 주만 바라게 하시려는 게 느껴졌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6).” 큰 힘이 되면서도 두려운 말씀이다. 나는 나 하나 건사하기조차 힘든 위인이란 것을 주께서 모르실까! 그럼에도 새로 또 아이들이라니.
나로 하여금 주께로만 시선을 두고 있게 하시려고, 아이를 향한 괜한 연민조차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것임을. 돌아보아 나는 내가 너무 감정이입이 심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지 말아야지, 조금은 냉정하고 분명해져야하지, 하고 반성하고 돌이킨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닐 거였다. 이루어야 할 일은 이미 이루어진 데 기뻐하라. 나는 말씀을 그리 듣는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20).”
그러면서도 얼마나 엉뚱한 데서 보람을 얻고자 하는지. 늘 나야말로 철딱서니 없는 어린아이 같아서 물인지 불인지 분간도 못하는 위인이라, 양을 이리 떼에 보내는 것 같으니.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1).” 이런 내가 아버지의 뜻이라니!
나로 하여금 주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단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뼈저리게 알게 하시려고, 그런 나의 연약함을 두고 주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니. 잘나고 더 훌륭한 인물들도 많았을 텐데 저들에게 숨기시고 이런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시는 것이다. 곧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22).”
그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자가 없다. 내가 아는 이 앎으로, 보는 눈이 복되다. 이를 알면 알수록, 보이는 게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내 안에 이는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속상함과 이 모든 답답함을 가지고 주 앞에 서게 하신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23).” 이를 어떻게 내 의지로는 보게 할 수도 알게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4).”
그러므로 주 앞에 애통해하는 심정으로 아이를 생각하고 속을 끓이고 애태워하는 것뿐이다. 고작 내가 하는 일이란 게 그 정도여서 송구하고 답답할 따름이었다. 시무룩해져서 더는 할 수 없겠다며 시큰둥하니 입을 빼물고 있었을 텐데, 새로 온 녀석은 또 지진아라.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다 내놓은 아이였다. 한 녀석은 눈치가 빨라 잰걸음으로 수업은 잘 따라오는 것 같으나 아이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왕따였다. 이 녀석은 뚱뚱하고 저 녀석은 너무 시력이 나빠서 돋보기를 쓰고. 누군 엄마와 사는 아저씨를 아빠보다 좋아하는 것에 죄책감이 붙들렸고. 어찌 다들 이처럼 상처투성일까. 마음이 저절로 기울면서 나는 또 다시 안달이다.
아, 나의 이 공든 탑은 매번 무너지고 또 무너지기를 되풀이 하는데도 어찌 고쳐지지가 않는 것이다. 더는 정주지 말아야지. 딱 선을 긋고 그만큼만 친절하고 사랑해야지. 공연히 마음 써봐야 소용없는 일이어서, 다시는 넘치지 않게 딱 그만큼만 사랑해야지. 나는 작심을 하듯 내가 힘들어서 못 견디겠다는 투로 생각하다가도 벌써 또 마음이 그리 기울어져 나서서 아이의 상황을 두고 안타까워하는 일이었으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어쩔 수 없는 일이었구나. 이 또한 내게 두시는 내 몫의 주의 일이겠다. 누군들 주의 팔의 능력을 분별할 수 있겠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 내가 내 죄를 담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 하물며 누구의 몫을 짐어지려 한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2).”
그저 들에 핀 백합화와 같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주만 바라자. 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이시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나의 공든 탑은 무너지고 또 무너져야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또 쌓아야 하는 과정을 되풀이 하는 동안, 그렇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그러므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다시 또 공들여서 쌓고 또 쌓았다가 무너지는 일이 되풀이 되어야 할 거였다.
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이를 보는 눈이 복되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곧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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