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9:62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편 135:13
뭔가 특별한, 어떤 획기적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늘 그 타령이 그 타령인 일상을 사는 데로 부르셨다. 변덕스럽고 유치하며, 자기밖에 모르고 서로 앞뒤가 다르며, 감정적이고 늘 기복이 심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도록 말이다. 아이들이 하도 말을 안 듣고 해야 할 걸 다 미루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굴어 뭐라 나무랐다. 서로들이 너무 친해져서 그런가 싶어 흔들어놓을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어떤 조건으로 글방을 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이 하나는 대뜸, 그래서 교회에 안 갈 거라는 소릴 하였다. 기가 차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와 주는 거였는데 그렇다면 안 다니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아이니까, 아이들이니까 그러려니 하면서도 나는 어떤 섬뜩함을 느꼈다. 그 죄를 다 자기 자손들에게 돌려도 좋으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치던 사람들이 떠오른 건 순전히 찰나적이었다. 우리 안에 그와 같은 속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괜한 소릴 했나, 뭐라 하지 말 걸 그랬나, 마음이 무거웠다. 속상하고 괘씸하다가도 공연히 또 망쳐놓은 것만 같아 신경이 쓰였다. 오히려 아내는 덤덤하니, 내버려둬! 하고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 상실한 마음으로 산다는 일이 어떠한가는 가히 짐작이 간다. 그래도 보듬고 그저 맹추처럼 허허 웃고 말 걸. 뭐라 정색을 하고 나무라면 영락없다. 애고 어른이고 좋다좋다 해줘야지, 그래서 누가 물으면 얼마나 정직해야 하는지 어렵다.
이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은 되풀이 된다. 그 가운데 나를 두심으로 나는 혼자서 헉헉거린다. 정신과에 들러 새로 약을 바꾸고 먼 길을 돌아 걸어서 왔다. 시무룩하니 의기소침하여 금세라도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말 그대로 왜 나 같은 이를 이와 같이 부르셨을까? 사람들 사이를 느릿느릿 지나오며 와락, 눈물이라도 쏟아질까봐 조바심이 났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두 주인을 내 안에 모시고 살 수 없다. 주신 대로 묵묵히 나의 이 한심하고 답답한 일상을 살아가는 게 사명일 거였다. 요지부동이라. 도무지 내 마음 같지가 않다. 언제까지 이 길을 가야 할까?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기는 한 것일까? 아이들의 되바라진 태도와 잔망스런 모습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주님은 나를 흔들어 나의 정도를 알게 하신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요 16:4).” 시무룩하니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고 있으려니까 그저 어떤 서러움이 또 화가 나서 속이 상했다. 뭐라 나무란들 그 소리가 괜한 것일 뿐인데 그럼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의연하여서 주 앞에 늘 담대하였으면 좋겠는데, 또 염려가 근심이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는 것이다. 너무 예민하십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자꾸 마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저 혼자 묻지도 않은 말을 설명하였다. 어떤 상실감, 그 일을 당함으로 비로소 내가 의지하던 게 무엇이고 누구를 바라고 구하는가 알게 된다. 어쩌면 나는 저 어린것들에게 내가 존중받고 이해를 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대뜸 돌아가면서 다시는 교회에 안 간다는 식의 문자를 하는 아이 앞에 나는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래서 어떤 미움이 또 실망이 나를 휘감으면 그게 다 나 때문인 것 같아 속상하고 죄송하다. 일을 다 망친 것 같다는 억울함마저 들면서 더는 손을 댈 수 없는 자리에서 주를 바라본다. 이내 나는 못하겠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너무 죄송하다 하는 마음만 일뿐 기분은 가라앉아 우울하였다. 이 모든 현실적인 상황은 주가 정하신다. 예수님은 이를 들꽃을 들어 말씀하셨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저는 왜 그 자리인지, 자라서 어떤 꽃을 피울지 계산하지 않는다. 수고도 길쌈도 아니하고 두신 바 그 자리에 충실한 것이다. 염려하는 증상이 내겐 너무 과하다. 그런 내게 주님은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게 하신다. 그 모든 환경은 주의 일이다. 나는 다만 이 자리에서 피어날 뿐이다.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은 이 현실을 또 다시 반복적으로 살아내는 일이다. 나의 어떤 계산도 궁리도 옳지 않다. 묵묵히 주어진 데 충실하면 될 일인데, 마음이 쓰여 견딜 수 없게 하심은 그것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일이었다.
담담해질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눅 9:5).” 그 안에는 이런저런 인연이 있고 어떤 미련이 또 아쉬움이 있는 것이라, 저마다의 이유가 핑계가 있다. 예수님은 그 길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58).” 그런 것이다. 누가 알아주는 게 아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마음이다. 그래서들 미루는가보다.
먼저 가서 아버지 장사를 지내기를, 또 가족과 작별하기를 청한다. 이래저래 먼저 마음 써야 할 게 많은데 주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이것만 하고, 먼저 저걸 끝내놓고, 이랬어야 하는데, 저건 어떻고 하는 마음이 늘 주의 길을 미뤄두게 하는 거였다. 그런 내게 오늘 말씀은 분명히 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35:13).” 다른 더 중한 게 없음이다.
주님은 물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눅 9:20).” 내 안에 주를 온전히 바랄 데 주가 세우신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이 모든 환경도 주가 주도하신다. 이 모든 여건도 주가 관여하신다. 내게 두시는 이 모든 일상의 지루하고 답답한 현실이 주의 것이다.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게 피어나 들의 백합화는 자라난다.
그러니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하여는 보다 의연하기를. 무던히 주만 바라보며 이 길을 나아갈 수 있기를. 나의 신경증도, 육신의 연약함도, 이런저런 상황과 여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들도 내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내버려둠으로써 오직 주만 의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때론 발의 먼지를 떨어내는 게 어렵다. 혹시나 하는 미련이 또 아쉬움이 사람을 구차하게 만든다. 나는 아이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가족과의 이별도 아버지의 장사도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일이라. 하던 거 마저 하고는 주를 따를 수 있는 자는 없다. 왜냐하면 계속 또 다른 할 일이 먼저 생기기 마련이어서 말이다. 놓아두자. 내버려두고 지금은 주만 바라자.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도 혹은 속상함도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니 주가 하실 일이다.
내가 내 살 궁리를 하듯 주의 일을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움을 받고 오해를 사고 더는 나를 외면한다 해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4).” 나를 잃을 때 주를 얻는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떠나 보다 고상하고 우아한 신앙을 꿈꾸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나는 다시 데이고 까져 상처투성이 아이들을 대해야 한다. 결코 저 아이들은 순하지 않다. 나의 호의를 자신의 권리쯤으로 여겨 마구 대하기 일쑤다. 예의 없다. 짓궂다. 아주 밉상이다.
어쩌겠나? 저들도 자기 스스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48).” 다시 또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해야 한다. 저 아이들을 영접함으로 주를 영접하는 일이다. 이 환경이 주의 것이다. 나의 연약함이 주의 은혜다. 마다하고 외면하는 일이 불순종이다. 지루하고 따분하며 답답하고 한심한 일상이 고스란히 주가 베푸시는 환경이다.
내게 오늘 가장 적합한 에덴이라. 그 환경을 조성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면, 들의 백합화처럼 그 자리를 따지지 않고 피어난다. 거기가 보도블록 틈새라 해도, 들풀은 자신의 소임을 다해 푸르게 피어난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시 135:1).” 다른 더 좋은 충성은 없다. 어떠하든, 그렇든 어떻든 피어나라. 찬송하라. 종들아 찬송하라.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2-3).”
그러므로 죽이시든 살리시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오직 주만 바람으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35: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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