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18. 4. 28. 07:17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누가복음 18:26-27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15

 

 

 

하나님의 진노는 이루어졌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인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 형태는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다. 내버려두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오늘 날 우리가 짊어지고 사는 온갖 악하고 추함이 그 증거이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진노의 제물이 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십자가로 이루어졌고, 이제 우리는 어린양의 심판을 받는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6:16).”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우리 영혼에 대한 권리는 그리스도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나는 이제야 왜 주님이 나를 포기하실 수 없는지 알았다. 남북정상이 만나 종전을 선언하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약속하는 순간이었다. 작성한 원고를 출력하여 탈고하면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가 몸서리치게 두렵기만 하였다. 마치 전쟁의 폐해는 그 남겨진 유구한 시간을 통해 거듭하여 고통으로 사무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버려두심의 결과에 대해,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고 피조물을 경배하며 여자를 역리로 쓰고 음욕으로 인해 동성애를 지지하고 이에 따른 보응을 받는다(1:24-27). 새삼스러운 것 같으나 이는 아주 오래 된 태곳적부터 자행되어오는 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누구는 주의 긍휼하심으로 길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마다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였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

 

어떻게 자비하시고 인자하심을 알면서도 저를 부인하고 다른 우상을 좇고 자연을 섬기는 길에 사로잡힌 것이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을 피해 숨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상실한 마음으로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내버려두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아무리 읽어도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내 안에 있는 것들이어서 당혹스러웠다. 어느 것 하나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 알면서도 그러는 것까지 말이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 이에 오늘 아침 본문은 그 해결책을 명시한다.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18:26-27).”

 

아무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남을 구원할 수도 없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그 하나님의 진노를 끊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이 되어 그 모든 죄악을 담당하신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그러므로 나에 대한 주권은 나에게 없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44:15).”

 

사람을 더 희망하는 일은 어리석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3-4).” 그와 같은데 그와 같이 사랑하여 기어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주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한 사람, 예수께서 짊어지셨다. 이제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하신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은 말씀에서 힘을 얻고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신 데 대해 놀라웠다. 이에 대해 누구도 몰랐다고 말할 수 없게 하셨다. 죄가 실수였다고 말할 수 없게 하신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3).”

 

꿈결 같은 어제 하루의 봄날, 누구는 그 두 남북정상의 만남을 감격하고 기뻐하는데 또 누구는 의심하고 회의하며 이런저런 문제를 지적하는 서로 상반되는 뉴스를 보면서도 알 것 같았다. 언제 문득 느낀 것이지만 죄란 아직 거기 있는 것이고 은혜란 이제 여기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거기 있었으나 주의 긍휼하심으로 이제는 여기에 있다. 전에는 즐기던 것을 이제는 멀리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알되 이를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는 미련한 마음에 대하여.

 

오늘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우린 얼마나 썩어질 것을 썩지 않을 것과 맞바꾸며 살아가고 이는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었으니, 그 상실한 마음이란 부모가 자식을 억압하고 자식들이 부모를 원망한다. 아니 아이가 무슨 잘못을 어떻게 하였기에 그 벌로 아이가 글방 가는 것을 너무 좋아하니까 당분간 못 가게 한다고? 나는 아이가 못 온 이유를 듣고 어이가 없어서 뭐라 할 말도 없었다. 막무가내인 부모의 억압에 아이는 다른 길을 모색하는데 그릇된 위로다. 혼자 틀어박혀 게임을 한다. 엉뚱한 데 마음을 두어 성적인 향락이다. 부모의 벌이 자식을 훈계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움을 쌓았다.

 

말씀은 경고하신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1:32).” 알고도 그리 행하는 자신 뿐 아니라 자식에게도 옳다 하니. 나는 아이의 상황을 듣고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다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2:1).” 그게 나의 이야기였다는 데서 등골이 오싹하였다.

 

그러니 나를 불쌍히 여겨줄 이가 누구신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이를 아는 자의 기도는 간결하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8:3).”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는 심정이 나로 하여금 심령을 가난하게 하였고 온유하게 만들어갔다.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덕분에 아무도 오지 않는 가운데 나는 저 둘 남북정상의 만남을 시청하였다. 도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기도밖에는 달리 더 좋은 수가 없었다. 나는 다를 바 없어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9:29).” 그러므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4:2).” 이는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44: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