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누가복음 17:9-10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시편 143:5-6
어쩌면 우리의 일이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정도이면 족하였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 3:3).” 아이는 죽고 싶다고 우는데 아이엄마는 시험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아내는 아이에게 라면을 끓여 먹이고 다독여 돌려보내면서 시험 끝나고 글방에 한 번 가보자, 하고 말하였단다.
아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기는 싫지, 실력은 안 돼 짜증은 나지, 놀기만 하고 싶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공책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책상을 쾅쾅 치더니 엎드려버렸다. 아이들은 원래 그러려니 하고 입을 삐쭉거렸고, 나는 당황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자, 아내 역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교에서도 애를 어쩌지 못해 매번 그 부모를 호출하는가본데, 그럼 또 부모는 아이를 다그쳐 매질을 하고 혼내기만 해대니.
정말이지 모두가 병들었다. 그런데 아무도 아파하지 않았다. 차마 아이엄마에겐 아이가 죽고 싶어 한다는 말을 해줄 수 없었다. 조금만 시간을 두고 기다려주자고 말해도 저이 입장에서는 아랑곳도 없다. 누구보다 자식을 잘 안다는 식이다. 우리가 잘 다루지 못해서 그런다고 여긴다. 하긴 내 속에서도 열불이 났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고 싶고, 그래서 혼쭐을 내고 말을 듣지 않으면 그냥 돌려보내는 게 상책이란 생각도 들었다.
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 17:1-2).” 두려운 생각이 든다. 전엔 관심도 없던 아이의 영혼을, 아니 주께서 보내신 뜻을 생각하면서부터 그래서 마음이 쓰인다. 화풀이 하듯 야단치는 일이야 누군들 못할까. 얼레고 달래 잘 마치고 돌아가는 아이를 불러 손을 잡고 초콜릿을 쥐어주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3).” 좁은 길로 가라는 의미가 이런 데 있었다. 넓은 길에서는 촘촘하니 그 동네의 사정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좁은 길로 들어섰을 때에야 지지고 볶고 악다구니 써대며 살아가는, 우리 곁에 두신 사람들의 삶이 보인다. 아니 그 현장에 내가 서 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 우리의 사명을 되새기게 하는 말씀이다. 조심하라, 용서하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로 가라. 전엔 보이지 않던, 아이의 마음이 그 피폐하여 강퍅해진 어린것의 고달픈 심정이 느껴지는 것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싫다. 화딱지가나서 뭐라 야단을 치고 보기 좋게 돌려보내고만 싶다. 아이는 또 밉상이라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오자마자 일찍 치과에 가야 한다며 설레발을 쳐대더니 실은 안 가도 되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얼마나 능청맞은지 모른다. 휘둘리듯 깜빡 속고 나면 허탈하다. 열불이 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미 7:9).”
내가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거듭 그걸 알게 하신다. 나는 다만 주의 종이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9-10).” 내가 먼저 감사를 받으려드니까 마음이 앞서 어려운 것이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해도 어쩜 이럴까, 싶다가도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자신으로 힘겨운 것일 테니. 나는 무익한 종이라. 주가 우리에게 맡기신 한 영혼이었다. 아이엄마는 아이엄마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다.
우린 먼저 저들을 위해 기도한다. 기도할 줄 모르는 아이를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 부모의 엉뚱한 염려와 그릇된 판단에 대하여도 내가 비판할 게 아닌 것이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아내는 며칠째 감기까지 와서 아이들로 시달리다보면 가정예배 드릴 땐 아주 곤죽이 돼 있다. 지겨운 일이다. 이 좁은 길이란 미주알고주알 저들의 일상이 그 초라하고 답답한 현실이 다 들리고 다 보이는 것이다. 주님은 그 길로 우리를 끌어내리신다. 조금은 고상하게 변화산에서의 황홀한 감사에 젖어 있으려면 말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습 3:11).” 내 안에 이는 교만을 쳐내게 하시려는 거였다. 정작 나는 아이를 구원하는 자가 아니다. 그 부모를 설득하여 저의 영혼을 건지라는 게 아니었다. 다만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주의 길을 예비할 뿐, 나는 무익한 종이라.
이에 대해 주께서 은밀한 중에 보신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 그 날이 오기 전에 우리는 날마다 그 날을 산다. 그리하여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욥 12:22).” 기어이 주를 마주하는 그 날에까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받을 감사가 아니었다.
아이의 예의바름과 그 부모의 공손함을 바라는 게 나의 병이었구나. 실은 내가 존중받고 인정받아 어떤 높임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어쩌면 세상 교사라면 보람을 거기에 둔다지만 우리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말씀이 구석구석 골목마다 그 좁은 길로 들려지기까지.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행 14:17).”
그 공평하심을 알게 하시려고. 결코 아이의 마음에 어떤 억울함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그 아이엄마의 마음에 어떤 불안이 또 초조함이 아이도 자신도 목을 조이는 일이 없도록. 이와 같은 말씀이 주의 사랑이 온 땅에 퍼져나가게 하시려고.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러는 거 아니야! 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아이의 처지와 됨됨이를 두고 주께 고하는 일이었다. 아이엄마에게 시간을 두시라, 아이를 위로하시라 말해줘야 하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내게 하신 일이다. 앞서 나의 지난날들 가운데 나의 돼먹잖은 성품과 고약한 심보를 고스란히 당해내면서도 날 위해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과 저들의 기도에 주의 인자하심으로 오래 참고 기다리셨던 주의 사랑으로,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게 나였음을.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였던 것을. 끝까지 참고 또 기다리셨음을.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시 143:5-6).”
지치고 힘들 때, 욕지기가 목구멍까지 치받고 올라올 때,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였다는.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러므로 나는 사랑에 빚진 자였고, 그저 다만 무익한 종인 것을. 그러므로 이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저 부모는 아직 그럴 겨를이 없는 일이고, 그 중대한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스스로도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 또한 그러하여서, 노아의 때에도 그러하였고 롯이 소돔을 빠져나오기까지도 그러하였다. 그러하기까지 그럴 수밖에 없는 저들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여기다 저기다 그 방법을 찾아 기웃거릴 거 없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눅 17:23).” 저들을 생각하되 저들을 위한 게 아니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32).”
곧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33).” 주를 바라는 일이란 넓은 길에서가 아니었다. 탁 트인 일 가운데서는 주를 바랄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4-35).”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다. 설마, 하는 게 저주다.
우리는 다만 주께 기도하는 일이다. 나는 무익한 종이오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143:1).” 이처럼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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