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요한복음 17:9, 16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시편 17:7
나로 하여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어디에 어떤 상황에서 주를 뵈옵든 내게 향하신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하는 기도로 오늘 한 날을 더하신 주께 빈다. 나의 이 빎은 주께서 날 위해 비신 그 기도이기를.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내가 주의 것이라는 이 말씀 앞에 든든히 설 수 있는 게 남다름이다. 복이다. 구별됨이다. 우리에게는 그처럼 쉬운 것이 누구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16).” 이에 따른 것이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에서 안도한다. 전혀 다를 바 없이 일상은 찌들어 세상 걱정으로 가득하지만, 다윗의 기도를 따라한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시 17:7).”
오늘부터 오기로 한 아이를 생각한다. 내가 무슨 수로 그 아이를 대할 수 있을까? 다만 주께 피하는 심정으로 같이 말씀을 읽기로 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지능이 좀 낮아 혹시 다른 걸로 다루어야 하나, 여러 생각이 많았다. 그러다 문득, 그럴 거면 내게 보내시는 이유가 없지 않나싶었다. 천천히 같이 읽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하자.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곧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은 내 의지나 어떤 선의에 의한 게 아니다. 신기하게도 주가 더하시는 마음이라 때론 나에게도 낯설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게 하시는 이가 함께 하심으로 그 증거를 나타내실 것이다. 내게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것으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돌이켜보면 오늘의 나 된 것이 하나도 주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으니,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5:10).” 이제 그와 같은 주의 은혜를 또한 나누어 흘러가게 하시려고,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이를 따름이라.
혹시나, 하고 기다렸던 게 어떤 안타까움으로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도 주의 사랑이라. 우리에게는 그 믿음이 제일 쉬운데 누구에게는 그 믿음이 가장 어려운 것이어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를 또한 주가 이루고 다져가시는 일임을. 내가 어찌 감당할 수도, 감당하려 해서도 안 되는 일임을. 그저 묵묵히.
주일날은 그렇게 늘 마음을 더하신다. 여러 형태의 사역이 있을 것이나 그 중심으로는 주를 바라는 것이어서, 다만 오늘에 내게 더하신 주의 은혜에 감복할 따름이었다. 이런저런 저들의 사정을 들려주다 저들보다 더했을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럼에도 오늘에 내게 향하신 주의 은혜가 참으로 크고 귀하다는 것을. 예배를 마치고 조금 멀리 돌며 산보를 하다 또 아내에게 그리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안타까움으로 속상하다가도 내가 저들을 흉보고 욕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 것이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잠 14:9).”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동안에는 별 수가 없다. 뭐라 한들 그게 귀에 들려질 리 없다. 그 영혼이 미련하여져서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말씀을 하나 깨달으면 그 안에 있는 삶이 펼쳐진다.
온갖 불의가 가득하나,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자신들뿐 아니라 그 자녀들에게도 괜찮다, 괜찮다하니 죄의 답습은 참으로 자연스럽다. 결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했던 것이 어느새 그 삶을 따른다. 그런 아빠 같은 남편을 만나서 자기 자신 같은 딸아이를 키우며, 또 같은 일에 억매여 허덕이는 것이다. 다 알고도 그러는 데는 하나님도 그냥 두신다. 이 또한 그러므로 나은 주의 뜻이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 4:15).”
어찌 그런가, 하고 묵상하다보면 ‘탕자의 이야기’로 그 이해는 더해진다. 저를 붙들어 강제로 집에 붙들어두셨더라면, 과연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났을까? 그 은혜가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시려고. 결국 저들의 오늘은 그 과정이라. 그리 생각하였다. 부디 주의 은혜를 깨달아 알게 하시기까지 참고 또 기다리시는 주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네가 무너지는 그날에 섬들이 진동할 것임이여 바다 가운데의 섬들이 네 결국을 보고 놀라리로다 하리라(겔 26:18).”
주가 내게 보내시는 것은 아직 기회라. 그 신호를 바르게 전하는 게 나의 일이겠다. 이렇듯 나로 하여금 주의 말씀으로 붙들려, 저를 생각하고 위하여 그 마음이 주의 도우심을 바라게 하시는 것처럼. 어쩌겠나.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하는 일이라면, 하게 하시는 것이어서, 결국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데 또한 안도하게 하신다.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시 104:13).”
다만 나는 감사로 주 앞에 선다. 서는 날 동안 주가 지탱하신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39:14).” 그렇지 아니한가. 어쩜 저럴까? 싶다가도 그게 나였다는 사실 앞에서 한 번 더 놀란다. 말씀을 증거 하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내게 향하신 주의 은혜가 참으로 기이함이라. 이미 죽어 마땅할 죄인에게 이처럼 귀한 일을 맡기신 데 따른 은혜였다. 예배에 나오기를 그처럼 기다리고 바랐으나, 그것이 결과는 아니었다. 나의 결실도 아니었다.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이 실은 주의 은혜여서, 내가 누군가를 이처럼 기다리고 위하여 안타까워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주님의 마음이 나의 자세여야 하겠구나.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나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바란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 오늘 오는 아이나, 이런저런 사정을 안고 내 곁에 두시는 이들은 주의 것이라. 내가 아버지의 것일 때 나를 이내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마주해야 하는 일이었다. 곧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16).” 주님의 기도를 배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
오직 주만이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 말씀 말고 다른 무엇을 들고 내가 저들을 맞을까?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3).” 힘닿는 대로, 마음 더하시는 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16).” 저들을 향하신 주의 사랑을 마주하는 일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0-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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