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11, 17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피폐함에 대하여, 그러한 가정의 구구한 내력에 대하여. 아이아빠는 늘 어려서 부친의 폭력을 감수하며 자랐다. 그 모친은 맞음으로 더 억척스러웠고 그런 가운데 저는 경계성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 서로 좋아하던 시절 아이아빠는 그 사랑을 갈구하는 표현으로 그 앞에서 자해를 두 차례 시도하였고, 아이엄마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지극한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되던 해 아이아빠의 부친은 죽었다.
아이엄마는 자신의 부친이 없는 것과 다름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었고, 모친은 부동산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위로 있는 언니와 큰오빠는 늘 말썽을 부리는 무능한 존재들이었고 여전히 지금도 다를 바 없다며 덤덤하게 말하였다. 서로는 왕래가 없었고 여전히 저의 친정은 전전긍긍 목구멍에 풀칠만 하는 정도로 생을 잇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아이엄마의 극성은 자연스러워서 아이아빠를 휘어잡고 살았고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한 딸아이는 그런 엄마를 향해 독재자라고 하였다.
같이 기도하자, 할 때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먼저 일어났다. 어느새 밤 열 시가 다 돼 있었다. 천천히 걸어서 어두운 길을 돌아오는데 와락,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때 저들이 다 교회 아이들로, 나는 교사였고 교회 형이지 않았던가? 믿음 안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주지 못하였을 때 그 주변의 삶이 얼마나 황폐해지고 피폐한 지경에 이르는가를 생각하였다. 다들 예뻐하던 또래의 한 아이는 엉겁결에 도망치듯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시집을 갔고 아이 셋을 낳았으며, 아이들을 두고 자살을 기도하였을 정도로 황망한 생활을 하였다. 다들 어찌하여 그런가.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오늘 말씀은 그와 같은 일련의 사연에 대하여 그 답이 되어준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 다른 이유가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입증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아이엄마에게 지금 네 딸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니 그 정도로 괜찮다고 여기는가? 너의 친정과 시댁의 형편과 사정에 대하여, 결국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기구함이 네 딸의 삶에도 그대로 전가되기를 원하는가? 다급한 심정으로 물었다. 본인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주께 엎드리라. 잘못을 고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라. 딸아이를 살려주세요, 하고 빌라. 그러자. 그렇게 하자.
경계성 성격장애는 공교롭게도 답습된다. 사랑을 갈구하는 대상이 자신보다 큰 경우 자해를 한다. 자신보다 약한 경우는 폭력을 행사한다. 저들은 그것으로 사랑을 구하고 표출하는 방식이다. 스스로를 학대함으로 상대의 사랑을 얻어내거나, 그 상대를 억압함으로 그 사랑을 쟁취하거나. 이는 단순히 그러다 말 일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6).” 그것이 현재 생활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도, 아직도 기도하자는 말에 주저하다 먼저 자리를 떠났다.
오전 일찍 올라가 설교원고를 다시 수정하였다. 아이는 약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을 먼저 왔다. 벌써 몇 년 전부터 같이 기도하였던 아이여서 그런가, 생소한 느낌이 없었다. 횡설수설 말이 연계가 없었고 맥락이 맞지 않아 그 총명함이 흐트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편하게 나의 상태를 말해주었고, 그러므로 함께 주를 바라고 주께 의지하자고 말하였다. 어떻게든 나으려고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그리 두시는 이를 바라보는 계기로 삼자고 말이다. 다소 황당하고 또는 뜬금없는 저의 말에 당혹스럽기도 하였다.
먹고 있는 약 때문이라고 하는데, 저는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약물에 의존하였고 그것이 지능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군 입대가 면제되었고 조만간 장애판정을 받아 사회적인 지원으로 취업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아이는 ‘여기’가 좋고, ‘글방목사님’이 좋다며 조증환자의 전형적인 감정표현을 여러 번 되뇌었다. 울증 땐 운동을 하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며 집에서 설거지를 한다고 말하였다. 주저리주저리 말을 내어놓는데 그 맥락이 맞지 않아 나는 한참씩 그 의미를 파악하며 들어야 했다.
그 시절, 저들이 같이 주일학교에 나올 때 나는 교회 선생이었다. 그해 여름성경학교를 기점으로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그렇듯 형성된 것이다. 중등부로 올라가고 같이 어디로 수련회를 갔었나? 지금 저 아이의 아이엄마는 그때 수련회로 아이를 잡으러온 세 모녀 가운데 큰언니였다! 횡설수설하는 아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우리의 인연이 기이함을 생각하였다. 그랬던 그이가 이혼을 하였고 그로 인해 아이가 신경증을 앓게 되었고, 이를 두고 '약사아이'와 여러 해 같이 기도하였던 게 오늘 이처럼 서로를 만나게 한 것이다.
큰언니가 너무 감사하대. 아픈 아이라 선생님이 많이 힘드실 거야. 오늘 아이가 스스로 거기까지 찾아간 건 정말이지 기적이야. ‘약사아이’는 그렇게 카톡을 남기며 혹시 모를까 염려를 하였다. 기도해라. 나도 무슨 배짱으로 아이를 맡는 게 아니다. 같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어찌 이루어가시나 보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구하는 것뿐이었다.
스물두 살. 아이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였다. 앞으로 또 오고 싶니? 하고 묻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네, 하고 대답하였다.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 청년부 모임도 하고 같이 성경공부도 한다면서 좋아라하였다. 우리는 그럼 수요일 오전에 만나기로 했다. 같이 요한복음을 읽자고 하였다. 아이는 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더니 하루만 와요? 하고 되묻는 것이다. 그래서 월요일에도 오전에 오기로 하였다. 책을 읽고 싶다고 해서 <꽃들에게 희망을>과 <몬테크리스토백작>을 꺼내주었다. 읽고 독후감을 써오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하였다.
같이 나가서 점심을 먹이고 돌아와 다시 차 한 잔을 하고 돌려보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일부러 그때마다 같이 기도를 하였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시는 말씀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을 거였다. 그렇게 아이가 돌아가고 다시 설교원고를 수정하고 좀 누우려는데, 엊그제 왔던 ‘자해 아이’의 엄마가 혹시 괜찮으면 가도 되냐고 해서 오라 한 것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1).” 여느 날보다 몹시 피곤한 하루였다. 이래저래 연결이 돼 있는 우리의 관계를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을 해 가시려는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 그때 그 시절, 나의 엉터리 믿음 생활로 인해 이처럼 모든 게 다 꼬여져버린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나마 ‘약사아이’만 꾸준하게 같이 연락하며 저의 신앙생활을 격려하며 살아온 셈이다.
하긴 내가 어떻게 무너져서 다시 주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 저 아이가 증인인 셈이다. 신기하다. 그 큰언니의 아이가 오늘 내 앞에 와서 우리가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영혼이 상한 아이를 통해 그 아이엄마의 신앙을 어떻게 붙들어 회복시키려 하시는가. 그때 수련회로 아이를 붙들러 달려온 둘째언니는 호주에 산다. 그 모친은 대장암 판정을 받은 병든 신랑을 건사하느라 몇 해째 노년이 초라하였다. 큰언니 되는 이가 고맙다는 말을 전해왔으니, 그게 또한 이제 시작이지 않겠나.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3-14).” 우리의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더는 죄의 종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 서로를 생각하고 주의 사랑으로 마주하는 데 있어, 우리는 친구라. 이와 같은 관계를, 그 일을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6).” 오늘 내게 두시는 이 한 날의 사명이 새삼 귀한 거였다. 이 한 영혼을 위해 그 오랜 세월을 참고 또 기다리시며, 그러는 동안 ‘내버려두심’과 '상한 마음'으로의 삶이란 게 그 실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처참한가. 그런 너의 삶이 네 딸아이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라냐? 나는 자해 아이의 엄마를 꾸짖었다.
후회가 되고, 이제 와서 보니 뭐가 잘못이었네 하면서도 여전한 것이어서. 나는 저에게 정신 차리자. 제발 정신 차려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며 저의 등을 토닥거렸다. 저 또한 폭식으로 인해 거구가 돼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오늘 말씀은 이를 선명하게 비추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1).” 주의 기쁨이 충만한 삶에 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17).” 기어이 서로 사랑하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시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오늘 다윗의 기도를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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