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전봉석 2018. 5. 22. 07:3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8:36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시편 18:27

 

 

곧 말씀뿐이라. 더 좋은 방편이 없다. 무엇을 가르치기보다는 함께 주의 음성을 듣기를 바랐다. 내가 어떻게 해야지, 하는 기름을 다 빼시는 것 같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어 알게 하신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왜 이이가 내 앞에서 이런 소릴 하는가? 저이는 어째서 저런 지경에도 주를 바라지 못할까? 하고 의문을 품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니 내게 보내신 것이다. 나는 기도할 줄 모르는 저를 위해 기도한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오겠다고 하고 저의 사정을 두루 말하는데, 그러라 마라 할 게 없었다. 또는 둘째 아들이 살림을 차려 살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는 노인의 심정을 내가 어찌 알겠나? 정신분석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칼 융도 그와 같은 마음이 저 위 태곳적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단순히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 마음은 그처럼 오래전에 생겨난 그림자이다. 처음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뒤 벌인 행각과 같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감추는 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 또한 하나님의 소리에 몸을 숨기는 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8).”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다보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까닭에 그 상실한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저들을 분석하지 않기로 했다. 왜 그런지 그 원인은 분명한 것이다. 굳이 그 원인을 자꾸 따져 물을 게 아니라, 주의 부르심에 응하는 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9).” 어쩌면 저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게 벌써 주의 부르심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시는 주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또한 나의 담대함을 바라지 않기로 하였다. 자꾸 내가 먼저 살 궁리를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할 것을 주시리라. 이미 감당할 수 있으니 그리 여기시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이가 오고, 오늘은 아이가 아이엄마와 함께 오기로 했다. 거기다 딸아이 남자친구도 온다고 하고. 나의 마음은 저 혼자 어수선하나 그 또한 주께서 그리 두시는 일이면 주가 이루실 마음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는 마음’이 아니라 ‘모르는 마음’이다. 흔히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류하는 그것이다.

 

어쨌든 털어놓는 것으로 첫 발을 떼는 셈이니,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 본질적으로 숨는 게 맞다. 죄의 특성이다. 두려움은 가장 정직한 반응이다. 숨긴 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스스로 은폐하거나 부정하며 그리 악전고투라. 힘에 겨운 싸움을 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마음의 토대가 되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는 융의 해석에 동의한다. 이를 융은 ‘집단적 무의식’이라 하였고, 기독교에서는 이를 원죄라 한다.

 

한데 우리의 관심은 이 세상에 사는 일이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게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악전고투하며 싸워야 하는 세상이 아니다. 결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 삶이 나아진들 잠깐이다. 우리의 나라는 여기 이 세상에 속한 게 아니다.

 

마음의 구조는 단순하면서 복잡하다.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으로 나뉘고, 나와 나의 그림자가 공존하며, 콤플렉스가 항상 자신을 주도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도 다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니까 그 지경이다. 더욱 단순해지면 되는 마음이다.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마음이다. 복잡할 거 없다. 의학적으로 어찌 분류하고 대처하여 처방을 내리는지 우리는 잘 안다. 통계다. 그렇더라는 것이다. 단언하듯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 우리에겐 말씀이 있지 않나!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시 18:30).” 나는 아이와 같이 성경을 읽으며 그 사실을 분명히 했다. 기준! 좌우정렬! 할 때 그 기준은 움직이지 않는다. 때론 더 멀리 또는 가까이 서기도 하겠으나, 기준은 여전히 그 자리다. 우리에게 말씀이다. 말씀은 순수하니, 우리의 방패다. 기준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27).” 이 간단명료한 진리가 귀에 안 들어오는 까닭은 다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 문제로 한시름 놓았다 여겨서 그런가? 아이엄마는 자신은 괜찮다고 하였다. 그래놓고는 구구한 소리라. 네가 아이보다 열 배는 더 문제가 깊다. 나는 미루던 말을 했다. 아이는 제 몸에 자해를 하면 너는 너와 저들의 영혼을 상하게 한다. 남편도 아이도 그 영향을 받는다. 좀 거칠게 들리겠으나, 그 셋 중 가장 무거운 책임은 너에게 있다. 오래된 사이라 이 또한 가감 없이 말해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충격이 없는지, 실실거리고 웃었다. 아, 농담으로나 듣더라는 롯의 두 사위가 생각났다. 어찌됐든 이런 말을 해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때가 그래도 소망이다. 그래도 아직은 말이다.

 

다들 이 세상을 기준으로 삼으려니까 그 모양인데, 그저 사느라 사는 게 버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두신 믿음은 그런 게 아니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36).” 다윗의 고백이 우리 모든 믿는 자의 것이다. 곧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 그럴 수 있는 게 복이라.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2).” 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에 대하여는 그 상실한 마음에 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해당되는 마음이지 않나.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 마음이 어떤가?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마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 좋을 대로 산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어쩌겠나? 그 길에서 터져 나온 자식의 문제와 자신의 문제는 모두 하나님과의 문제인 것을 한사코 부인하는 데야 별 수 있겠나?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아무리 이르고 일러도 들릴 소리가 아니다. 주께서 찾아와 주지 않으시면 말짱 헛것이라.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변명하지 못하게 하신다. 타락한 처음 사람 아담을 먼저 찾아오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처음 살인자 가인에게도,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4:10).” 사라에게 쫓겨나 서러워하는 하갈에게도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16:8).”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오늘도 나로 하여금 내가 저들을 만나고 그 구구한 이야기를 듣고, 분명히 들려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무의식의 세계가 어떻고 콤플렉스가 어떻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것들과 싸워 이겨 행복하게 살다 오라고 우리를 여기에 두시는 게 아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하시는 주의 음성이 크게 들린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그런데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오늘 아침, 이 말씀을 딱 이 시점에서 묵상하게 하시는 바 그 의미는 분명하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 18:6).” 먼저는 주의 성전에서다. 내가 있고, 있어야 하는 곳에 저들을 보내시는 이유였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13).” 다음은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27).” 이로써 겸손을 회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려고. 곧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30).” 그러므로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36).” 내가 할 일은 분명하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29).” 이는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31).” 전혀 꿀릴 거 없다.

 

그리 구원하시려는 목적은 분명하여서, 먼저는 평안을 주려 하심이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116:7).” 그리하여 주를 사모함이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73:25).” 이로써 주를 찬양함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63:3).” 그의 즐거움이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64:10).”

 

곧 돌이켜서,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호 1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