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전봉석 2018. 5. 24. 07:07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1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시편 20:7-8

 

 

 

아이와 성경을 읽고 저의 말을 듣는 일은 즐겁다. 나이는 스물둘. 그러나 열다섯 혹은 열둘. 말은 어눌하고 그 생각은 두서가 없어 그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곤 하지만, 그래서 내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다고 하니 다들 풋, 하고 웃는다. 뒤이어 오후께는 다른 일로 누가 왔었다. 어떤 답답함. 저의 나이는 마흔넷. 그러나 여덟 또는 다섯. 자기 말만 늘어지게 하여 나의 마음은 지겨웠다. 한 이야기를 하는데 얽히고설킨 다른 이야기를 하느라 정작 자신이 처음에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길을 잃곤 하였다. 단단한 벽 같아서 무슨 말을 하려 해도 듣지를 않는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아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비로소 이 말씀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성찬예식 때 자신은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다 나오세요! 하는 바람에 얼결에 포도주를 마셨다고. 그럼 안 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가 물었다. 성경을 같이 읽을 때면 아이가 먼저 기도를 한다. 그 내용은 순수하여 꾸밈이 없다. 에두르지 않고 겉치레가 없다. 신앙을 고백하고 도우심을 바란다.

 

나는 아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목사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학습과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 자신은 아픈 사람인데 그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그래서 아이는 그래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걱정을 하였다. 아니다. 교회 목사님이 잘 지도해주실 텐데, 그럴 리 없으나 안 된다고 하면 나랑 같이 성경공부하고 올 추수감사절에 학습 받고 내년 부활주일에 세례 받자, 하고 아이를 격려하였다.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에 부끄러울 정도로 나도 좋았다. 누가 언제 이만큼 세례를 바라고 좋아했던 적이 있었던가?

 

오후께 느닷없이 들이닥친 그이는 제 할 말만 하고 갔다. 아이 문제로 왔다 온통 집을 매매하는 이야기, 시어머니와 시아주버니와의 금전거래에 이어 결국은 돈 이야기만 하다 갔다. 저는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 딸애가 그러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게 오는 까닭을 나는 묻지 않았다. 시어머니를 좀 오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공짜니까 시어머니가 잘하면 오긴 올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이 없었다. 여섯 시가 다 돼 저가 돌아가고 나는 급 피로감에 소파에 널브러졌다.

 

터무니없이 이어지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듣는 일은 고역이다. 왜 내게 저런 소릴 다 하나 싶은데, 그렇다고 가로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인데 그 말을 하다 보니 번번이 길을 잃는 셈이다. 아니 지금 그게 저의 상태다. 관심의 정도다. 오죽하니 내 말은 도대체 아이 이야기는 언제 할 거니? 순위가 있다면 몇 번째니? 하고 물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다. 자기애가 넘쳐 남을 주도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담을 쌓는 식이고, 군림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질이다. 본인만 모른다. 자기는 그렇지 않단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내게 두시는 일이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렘 3:15).”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에 대해 나의 영혼이 반응하게 하신다.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마음, 그 상실한 마음의 상태는 확연하여서 뭐라 한들 도무지 들을 귀가 없는 것이다. 제 말만 일삼는 셈이다. 오전에 와서 늘 같이 차 한 잔을 하며 이런저런 말을 하는 이도, 항상 자기 말만 하다 나더러 말을 좀 하라 하는데 그래놓고는 들을 줄 모른다.

 

왜 주님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는지 알 것 같다. 이는 주어지는 것이지 이루어내는 게 아니다. 학습으로 되는 게 아니다. 기질의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막힌 담 같아서 그 안에 있는 자기 말에 겨워 도무지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말만 하다 휙, 돌아가는 이에게도 나의 들음은 사역이다. 그러라고 여기 두신다. 그리 여겨졌다. 가도 돼요? 하는 문자를 받고 잠시 망설이다 그래도 오라 해야 하는 일이다.

 

베드로는 세 번 예수를 부인했다. 예수님은 세 번 저에게 물으셨다. 베드로는 모닥불을 쬐며 멀찍이 서서 예수를 모른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불 곁에 앉아 저에게 물으셨다. 예수를 떠난 저들이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 21:9).” 내게 더하시는 이 일은 저들로 직면하게 하시는 일이다. 양육이란 먹이고 나누며 그리 함께 하는 일이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15).”

 

저희의 입에서 고백이 나오기까지.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16).” 세 번씩이나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저는 분명히 죄책감으로 눌린 것이다. 막힌 것을 뚫기 위해서도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17).”

 

또한 저를 마음에 합한 목자로 세우시기 위하여, 가르치심이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여기서 내게 필요한 것은 참고 또 기다리는 일이겠다. 속단하지 말고, 뭐라 다그쳐 무엇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말고! 그러기 위해 성령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나는 구하였다. 지치지 않도록, 그래서 내가 예단하여 결정하려 들지 않도록.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이것이 내 일이라.

 

그래서 더 경건에 이르는 연습도 필요하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늘 기도하기를 주의 마음과 주의 사랑을 달라고 구한다. 그렇지 않고 내 마음으로 노력하고 내 사랑으로 감싸려하면 십중팔구 내가 먼저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질린다. 요즘 아이들, 영악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 부모의 몰지각과 몰염치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러니 주의 마음이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도장 같이 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내 팔에 두어야 할 게 말씀이다. 누구를 권면할 때 말씀 밖의 말을 하지 않게 해주십사, 기도한다. 그래 다 잘 될 거야. 너 잘못이 아니야. 다 그렇지 뭐. 하는 따위의 말은 오히려 그 영혼을 죽이는 일이다. 다행이라 여기는 게 가장 무서운 병이었으니, 아이가 그만하길 다행이라 하면 그 정도에서는 예수를 바라지 않는데도 어찌 그게 다행이겠나? 그런 지경에 아이엄마가 씩씩하니 다행이라 하면 그래서 더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는데도 그게 어찌 다행한 일이겠나?

 

겸손하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결코 내가 저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서 저를 내게 보내시는 게 아니다. 내가 저에게 권면하는 그 말은 오롯이 내게 들려주시는 주의 음성으로 내가 먼저 들어야 한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 7:17).” 가지를 떠나 무슨 열매를 바랄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일은 결국 나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자칫 말씀에서 조금만 비껴서면 내 말이 앞서는 법이다. 그래서 말씀을 두셨다. 달리 어떤 수단으로는 이룰 수 없다. 오늘 아침, 말씀은 그리 일러 알게 하신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힘입어야 한다. 다른 생명은 없다. 저는 아직 주를 모르고 바라지 않아도, 그럴 줄 모르는 저를 위해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 중보다. 다른 방도는 없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 20:7-8).” 나는 저에게 하나님을 자랑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4).” 내가 주께 아뢰는 일. 그러기 위해 말씀을 의지하면서,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