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3:16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시편 24:3-4
누가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가만두지 않는 권세’는 기껏 오겠다던 아이에게 무슨 일을 꾸몄다. 젊은 예비부부는 간밤에 양가 어른들의 반대로 당장 다음 주에 있을 결혼식까지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이래저래 마음이 쓰여 나는 자꾸 찬송을 부르면서 울컥하였다.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악함과 연약함과 미련함에 대하여 ‘그 이름’ 외에 다른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였다.
한 달에 한 번 형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고, 모처럼 조카아이도 같이 왔으나 여전히 ‘그냥 온 사람’ 티를 내고 있었다. 사람을 보고는 이 일 못한다. 새삼 드는 마음이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어떤 서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예배 시작 전부터 마음이 동요되어 흔들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6).”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대하여. 어떤 어려움은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그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다.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사 26:11).”
대학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교회에 올게요, 하며 한사코 미루던 녀석은 이내 재수 삼수를 하였고 군대를 다녀와 다시 도전을 하였으나 원하는 대학에는 갈 수 없었다. 당장 그 생활이 턱 받쳐 치고 드니, 어려서 자신을 버리고 재혼한 아버지를 그처럼 미워하더니, 어쩔 수 없이 그의 사업에 같이 뛰어들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 공부를 하였는지 올해 원하던 대학에 차석으로 합격을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 결혼도 해야 하고, 생활도 이어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대학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다.
이런저런 사연을 양가 어른들이 자꾸 들쑤시며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인지, 상견례도 치르고 날짜까지 잡은 마당에 자주 부딪치다가 급기야 주일에 함께 와서 예배를 드리겠다던 전날에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아침 일찍, 밤새 또 일이 터졌다며 문제가 온 것이 전부였다. 대충 그 사연을 아는 터라 우선은 묻지 않았다. 참 신기하다. 그 은밀한 죄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훗날에 당할 일이 아찔하였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욘 1:14).”
그때 고등학교 때 녀석은 호언장담을 했더랬다. 원하는 대학이 전제였고, 대학에 들어가면 자신도 함께 글방이 아닌 교회로 나오겠다고 약속하였던 것이다. 나는 여러 생각이 많았다. 종일 아이 생각으로 마음이 어려웠으나 다시 먼저 연락을 해보기는 좀 그럴 것 같아 참아야 했다. 이내 먼저 손에 든 걸 내어놓지 않고는 어림없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막 10:21).”
늘 우리는 어떤 선택의 갈래에 놓인다. 우선순위가 분명하지 않으면 늘 휘둘리기 십상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와 같은 말씀을 받아 의지할 수 있는 게 축복이라. 어떻게 강요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다들 보면 여기가 막힌 담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이를 제하였으나 여전히 그 발길을 돌리는 데는 다 그만한 학습된 변명 때문이다. 몸에 익은 것이다.
오면 이렇게 전해야지, 하고 설교 원고를 수정하고. 글씨를 써서 그 내용을 액자에 담아 어떻게 설명을 해주어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던 게 보란 듯이 무산된 것이다. 특히 저 녀석에 대한 어떤 기대와 안쓰러움이, 듬직함과 애처로움이 언제나 나의 감정을 먼저 고조시켰다. 내가 줄 수 있는 한 가지,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오늘 아침 재차 확신시키시는 것 같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해서도 안 된다. 나는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그 소리는 황량한 모래 언덕을 넘지 못한다 해도, 흩어지다 둘러선 이들에게 메아리처럼 들리다 마는 소리라 해도,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어쩌면 그럼에도 늘 같은 자리에서 ‘늘 똑같으세요.’ 하는 말을 듣는 것도 내 일이겠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고, 돌이킬 때 그 길을 가늠하는 소리로써 살아내는 일이 말이다. 사명이겠다.
또 휑하니 바람만 지나는 길목에 섰다 해도,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내가 줄 수 있는 이름은 오직 하나,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 허탄한 데 마음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음으로 주 앞에 청결할 수 있는 것이겠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내어줄 수 있는 것이었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 그 마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주의 마음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 무던히 그러할 수 있기를. 어떠하든지 그럴 수 있기를. 결국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내가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일에 대하여는 마음이 상하지 않게 하시고, 온전히 두어 그 마음이 주의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시기를. 그러므로 분별력을 주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더하여 주시기를. 곧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 때로는 나의 연민이 또 감정이입이 주의 뜻을 헤아려 아는 데 있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 모르겠다. 울컥하여 이미 울고 싶은 아이처럼 시무룩하게 되는 것이니.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14:7).” 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성향에 따른 문제도 아니다. 나야말로 그 중심에 두고 서야 할 이름,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오늘 말씀 앞에 나부터 무릎을 꿇는다. 누굴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도리어 주를 바라는 마음에 훼방이 될 수도 있겠다.
휘둘리지 않게 하시기를.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8-19).”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좀 더 오랜 시간을 더 두고 봐야 하는 일인지도. 그러는 동안 내가 아이에 대한 기대와 기도가 끊어지지 않기를. 결국은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에서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이럼 저럴 것 같고, 그럼 이래서 더 나을 것 같은데. 번번이 나의 생각으로 나는 힘들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미리 정하신 것으로 또한 오늘을 이루어가게 하시는 것이겠으니, 주만 바라자.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 24:7).” 주가 하신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5-6).” 이루실 이면 이내 주께서 또 인도하실 것을. 어찌됐든 모든 문제의 답은, 하나님은 선하심이다.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0).”
그러나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 24:8).” 못하실 리 없는 주께서 그 이름으로 나를 서게 하시는 것이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9).” 곧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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