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전봉석 2018. 5. 26. 06:58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7-8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편 22:10

 

 

 

전날에 운동을 심하게 해서 몸이 아프다며, 아이가 오는 것을 다음 날로 미루었다. 아무래도 아이엄마가 자주 가는 게 결례가 될 것 같아 그리 하게 한 것 같았다. 설교원고를 손질하고 글씨를 썼다. 하나님 말씀으로의 무오함으로 성경에 대한 회의와 삼위일체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였다는 아들애의 갈등이 내게는 오히려 기특하였다. 아내는 늘 못해준 일만 떠올라서 눈물을 찍어냈다. 실은 나 역시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전날에 통화한 어느 아이의 결혼 소식이나 신기할 정도로 다들 그럼에도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는 것에 속이 상했다.

 

엉뚱한 데 자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불순종 하는 마음의 단적인 예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단호하시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쓸데없이 그런 데 신경 쓰는 게 문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중요한 건 우리에게 맡기신 증인된 자의 삶이다.

 

이는 누가 설명하여 설득력 있게 알려줄 수 있는 대목이 아닌 듯하다. 나 역시 내 안에 드는 회의의 근본적인 이유는 싫었던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그냥 하나님이 싫은 것이다. 싫어서 그 싫은 이유를 회의하는 데, 엉뚱한 질문을 쏟는 데서 찾았다. 어거스틴도 다 알면서 조금만 더 늦추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회의했던 것을 고백하지 않던가! 전날에 묵상한 베드로의 경우도 어떤가? 기껏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받고도,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요 21:21).”

 

그러니 사람 다 그런다. 근본적으로 그 속에 자신이 신이다. 이를 무신론자인 칼 융도 정신분석에서 그리 정의하였다. 자아와 자신은 다르다. 자아는 표면에 드러난 의지의 표상이면 자신은 그 안 깊숙이 존재하는, 무의식을 지배하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자신은 자아보다 크다. 자기를 실현하려는 의지가 숭배다. 끊임없이 요구와 지배를 받는다. 의식 바로 아래의 그림자도, 무의식이 의식화 된 아니마와 아니무스도 결국은 다 자기 실현의 발현이다. 자기가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 사람 된 모든 인류의 공통된 죄의 형질이다. 나는 저의 책을 그런 시각에서 읽었다. 훨씬 이해가 빠르다. 저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 속에 신이라 불릴만한 ‘자기-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니 누구랑 얘기하다, 그 정도면 하나님을 알만할 텐데도 어찌 자꾸 비껴가며 외면하려 드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나였지 않았나? 결국은 그와 같은 회의를 기회 삼아 하나님 거역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불순종하고 늦추었으며 저를 바라고 의지하는 일을 나중으로 여겼다. 그 긴 세월 동안 돌고 돌던 삶을 돌이켜볼 때 나의 기도는 언제나 나처럼 너무 먼 길을 돌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고통의 절규로 가득한 오늘 시편 22편을 읽으면서 비로소 주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 앞에 엎드릴 수 있는 게 축복인 것을 다시금 확신한다.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다. 그 모든 문제의 답은 하나다. 곧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나를 죽이신다 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욥의 고백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를 바란다.’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고백과 같고, ‘나의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낫다.’는 다윗의 고백으로도 입증이 된다. 이는 곧 사슴의 곡조에 맞춘 오늘 시편의 고백 가운데도 나온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시 22:10).” 그 어떤 지경에도 하나님은 나를 맡으셨다.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6).” 달리 더 좋은 소식이 또 있을까? 종일 좀 마음이 우울하였던 것도, 그럼에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한사코 자기를 신으로 두고 살기를 원하는 우리들의 무의식 속의 원죄에 대한 원통함이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저희로 그 정답을 알게 할 수 있을까? 그러라고 오늘 우리를 증인으로 세우셨구나, 하는 데서 더욱 막중한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이는 결국 달리 방도가 없다.

 

오직 성령이 임하셔야 할 일이다. 그러할 때 나는 나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힘쓴다. 어디 멀리 오지의 나라 저편이 아니라, 나의 땅 끝은 더는 마음이 닿지 않는 저 사람, 외면하고 살아도 무방한 이 사람에게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는 ‘되리라.’ 하는 단정의 말씀이다. 돼야 한다는 명령도 아니고 될 것이다 하는 미래형도 아니다. 내 안에 이는 어떤 안타까움이 그 증거였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그냥 ‘들어가라.’는 명령문이 전부가 아니라 그러기를 힘쓰라고 의사 누가는 기술하였다. 왜 그런가? 누구는 훗날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마태는 훨씬 더 그 이유를 선명하게 구분하였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좁은 문보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 길은 좁아서, 지겹다. 속속들이 다 안다. 내 사정과 형편은 물론 저의 것까지 알게 된다. 숨기고 싶은데 감출 수 없이 좁다. 나는 요즘 이 문을 그리 이해하고 있다. 서로가 같이 교회를 이루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바로 이 정도 거리의 사이다. 적당히 멀고 그래서 친절한 타인으로 딱 그 지점에서 안부를 묻고 지나가는 말로 초대를 하는 정도의 성도와 성도란 없다. 그게 싫어서 더 큰 교회를 선호하는 이들은, 단언하건대 멸망의 길이다. 후에 내가 주를 알았다고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종종 내가 왜 이 사람의 저런 이야기까지 듣고 있어야 하나? 어려울 때가 있다. 도대체 말도 안 듣고 교회도 안 나오는 이 아이의 그런저런 사정을 내가 왜 떠안듯이 붙들고 같이 씨름해야 하나? 그래봐야 또 아쉬울 게 없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갈 텐데! 하는 어떤 자기방어가 늘 내 안에서 나를 괴롭힌다. 여전하여서 내 안에서 나를 신으로 모시고자 하는 숭배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가 저를 보내시면 이제는 별 수 있나? 젊어서는 내 맘대로 띠 띠고 다니고 싶은 데로 갔으나, 더는 그럴 수 없게 하시는 것이다.

 

은혜란 문제의 답을 아는 것이다. 문제를 푸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이 하게 하신다.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되는 일이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주가 세우신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행 13:47).” 내게 두시는 땅 끝에서 나는 어질머리를 느낀다. 이 어질병은 머리를 혼미하게도 한다. 내게 폐가 될까 하여 아이 보내는 일을 주춤한다고 하나 너무 밀착되는 것을 경계하는 일이다. 주초에는 아이 일로 소상히도 연락을 하다가도 주말이 되면 뜸한 것이 은연중에 주일에 대한 거부감이다. 글방 선생으로는 좋은데 목사로는 부담스러운 게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경계라. 참 싫은 것이다. 자기를 신의 자리에서 내려놓기가 말이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기가 말이다.

 

우리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게 되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쫓겨났다. 저들이 스스로 다시 찾아올 수 없게 불 칼을 세우셨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다시 말해서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는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다. 찾을 수도 만날 수도 없다. 이로 인해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고, 이 한 의!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 일이다. 뭐랄까? 나의 ‘땅 끝의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치를 떨다보면 그 원인이 더 뚜렷하였다.

 

내 마음의 땅 끝에 나 자신을 신으로 삼고 자신을 숭배하던 날들이 있다. 저들의 어쩔 수 없음을 나는 그리 이해하게 되었다. “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9).” 주님의 승천,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사 8:9).” 주가 아니시면 그 끝은 다 패망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일어나 그들을 쳐서 이름과 남은 자와 아들과 후손을 바벨론에서 끊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4:22).” 두려워할 줄 모르는 영혼처럼 무서운 게 없다. “그가 목소리를 내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 10:13-14).” 그저 괜찮다고 쥐고 섰는 게 우상이라. 어쩌면 좋을까?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그러므로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시 22:11).” 나는 다만 기도한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9).” 그러므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22).” 이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6).”

 

곧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27-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