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전봉석 2018. 5. 25. 07: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복음 21:18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21:13

 

 

 

하루가 길다. 오전 내내 입원해 있는 아이의 외출 문제로 아이엄마와 통화를 해야 했고, 오후에는 연이어 꼬맹이들 수업이 두 팀이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들처럼 여기던 녀석이 결혼 소식을 알려왔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아예 길거리 벤치에 앉아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저의 어머니 이야기까지 들어야 했다. 돌아와 다 저녁에는 아들애의 종교적인 회의(?)를 듣다가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 통화로나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다.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것으로 다녔거니와’ 이제는 임의로 나를 여기에 두시는 주의 손길을 느낀다.

 

베드로의 트라우마도 엄청났을 것이다. 나름은 열심을 다해 주의 수제자로 지냈던 이가 저들의 곁불을 쬐며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으니 그 자책감이 어떠했을까?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막 14:72).” 이는 엄연히 그럴 것이란 예수님의 우려에도 그리 된 일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 22:34).”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이다.

 

그러던 이여서,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3).” 그 속이 오죽했을까? 그런 그를 예수님은 모닥불 곁에서 만나신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9).” 그리고 세 번 부인하고 떠난 그에게 세 번씩이나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똑같이 세 번씩 당부하신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어쩌면 참 잔인한 일 같은데, 죄를 직면하지 않고는 참 회개도 없다. 이 또한 임의로 주가 인도하신다.

 

말씀 앞에 앉아 있으면 때로는 참 묘할 따름이다. 그런 와중에 아이는 내일도 가도 되는가 물었고, 그러한 아이의 마음이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이었다. 목사님이 바쁜 날인데, 일찍 갔다가 성경공부하고 우리 같이 스파게티 먹어요. 아이의 서툰 마음 씀이 느껴졌다. 덕분에 설교원고를 서둘렀고, 물론 와도 돼! 우리 그러자. 하고 답을 보냈다. 누가 ‘세례’라는 명칭으로 오만 원을 입금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오늘의 모닥불 곁에 주님이 나와 함께 앉아 계신 것이다.

 

녀석은 주례 없이 결혼을 하기로 했다. 내게 부탁을 하고 싶었으나, 사정을 아니 괜히 속상해할까 봐 말도 못했던 거였다. 수원 어디에서 내달 초에 결혼식을 한다니까, 아내는 마음 아파하는 나를 대신 해서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어릴 적, 저의 부친은 바람을 펴 이혼을 했다. 혼자 남겨진 엄마는 씩씩하게 건축 일을 하며 두 아이를 키웠다. 중학교 때 아이가 글방에 오면서 ‘아빠처럼’ 나를 잘 따른다고 아이엄마는 고마워했다. 그래서 둘째 딸애도 잠깐이지만 글방엘 다녔다. 녀석은 대학을 낙방하고 군대를 갔고, 서너 번 재도전을 하는 동안 자주 글방을 오갔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한사코 다음으로 미루면서 말이다.

 

글방을 이곳으로 옮길 때도 제일 먼저 달려와 힘을 보탰다. 그러던 녀석이 살 궁리 끝에 청소년시절 그처럼 증오하던 아버지 공장으로 들어가 일을 도왔다. 이번 결혼에도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 대신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자리를 차지했다고, 그리 됐다며 말을 흐렸다. 나는 저의 친모가 안쓰러웠다. 파산에 이어 공황이 왔고 여전히 우울증으로 두문불출하며 지낸다고 하였다. 결혼식장에 가지 못해 미안해하자, 그러실까봐 주례도 부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주례 없이 결혼을 하냐? 물으니 쌤 아니면 의미가 없다! 하는 저의 말에 고마움은 미안함으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식을 올리기 전에, 나는 주일에 와서 같이 예배드릴 수 있나? 하고 물었다. 저 두 사람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겠다고는 하는데, 어찌 될지. 어느덧 스물일곱. 사춘기 중딩 녀석이 꼬물거리며 제 할 말은 다 하던 저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런저런 집안 사정을 처가에 숨기고 결혼을 하려니, 친모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가. 자주 어머니 이야기를 하였고 될 수 있다면 그럼 예전처럼 선생님이 통화로라도 엄마를 좀 뵐까? 하고. 그럼 그리 말씀드리라고 했다. 운전을 하고 다니기는 한다니, 그러다 좀 여력이 되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지 않겠나.

 

일련의 이런저런 상황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펼쳐지는 것이어서. 이것이 사명이지 않겠나, 그리 생각하고 말씀을 다시 읽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그러면 나는 어찌 기도해야 하나?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시 21:13).”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아이는 전전날 외출을 했으면서도 하루 지나 또 외출을 고집하느라 온갖 궁리를 끌어들였다. 경계성 성격장애의 특징이 바로 그처럼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가 조종하려 드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해도 서슴지 않는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도 곁에 입원한 또래 아이가 자살하겠다는 말을 자기의 공포로 끌어와 두려움을 호소하고, 이를 주치의는 심각한 신호로 인식하여 외출을 허용하게 되었고, 저이는 그런 아이의 속셈을 빤히 알겠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들들볶듯 내게 몇 번씩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더 큰 소요가 있기 전에는 결코 주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미련함이란 이내 자기 마음을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베드로도 예수를 배신하기 직전까지 자신의 마음을 확신했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장담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 14:29).” 아이가 병원에 입원을 해서도 밖에 있는 그 부모를 조종하는 것이고, 여의치 않을 땐 가차 없이 자신을 벌줌으로 상대를 아프게 한다. 아프게 함으로 사랑을 획득하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서로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장담한다. 어쩌겠나? 이처럼 스스로 짊어지는 마음이라니!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시 21:1).” 다른 무엇으로 기뻐할까? 나는 나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주 앞에 모두 인정할 때, 어디로 띠 띠우고 가시든 결론은 주가 함께 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득 엉뚱한 심리는 작용하는 것이니까,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요 21:21).” 하며 누구와 견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2).”

 

그 상관없는 일들에 대하여는 나로 하여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저가 죽지 않고 살든, 하늘이 두 쪽이 나든, 내게 두시는 그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할 따름이다. 보면 늘, 사람 참 지긋지긋하다. 누구 말도 듣지 않으려는 심리는 어쩌면 아차, 하는 순간에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고착된 보호본능일까? 그러니 그 고집들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방어기제가 되었다. 사탄이 여자를 속였고, 속아 넘어간 여자는 남자를 끌어들였다. 그래서 죄의 굴레는 항상 같이 지는 법이다.

 

죄의 속성은 먼저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남을 의식하고 비난하고 혹시나 하며 견주어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하고 묻는다. ‘하지만’ 나에게 만족하는 것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이는 순간의 일이다. 그러면서 수치와 비난에 대해서 걱정한다. 아무도 모르는데 저 혼자 쩔쩔맨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괜찮다며 거짓 평안으로 위로를 삼는다. 누구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경우다. 서로가 견주며 이와 같은 악순환은 되풀이 된다. 아이의 경계성 성격장애는 우리의 가장 표면적인 죄의 민낯이다.

 

마음이 어려웠다. 이래저래 속상하기도 하고, 유난히 생각이 많은 날이었다. 아이와 통화를 끝내고 가만히 벤치에 더 있으려니까 울컥, 하는 어떤 서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나는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연거푸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주의 이름을 위해서도 이 모든 상황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시 109: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