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전봉석 2018. 6. 1. 07:02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사도행전 7: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시편 28:1

 

 

약속을 붙들고 사는 일,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과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사역이었다. 곧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것은 그와 같이 말씀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은 이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행 7:5).”

 

어떻게 이를 붙들고 살 수 있었을까? 가시적인 어떤 성과도 없이, 너무 막연하여서 두렵기도 하였을 텐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그럴 때 굳건히 붙들 다섯 가지의 ‘오직’이 있었으니, 첫째는 ‘오직 믿음으로’ 산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

 

둘째는 ‘오직 은혜로’ 산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그러니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 곧 이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9).” 셋째는 ‘오직 그리스도로’ 산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자신을 내어주신 이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2).” 그러므로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10).” 곧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명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이다. 넷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어떻게 우리 이해로는 감당이 안 되는 말씀이지만, 이미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택하신 바 된 오늘을 사는 것이다.

 

이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나의 연약함을 알면 알수록 더욱 확연하여진다. 그리하여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7-29).”

 

오늘 내가 감당하고 있는 일이 내 힘과 내 지혜로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닌 것으로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글쓰기를 하다말고 와락, 울어버리는 아이로 인해 당황하였다. 곁에 있는 아이는 이 일이 처음이 아닌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나는 놀랐다. 어쩌다 짜증이 올라오고, 이를 상대에게 전가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전형적인 원망이었다. 기껏 같이 얘기하고 낄낄거리다 문득 자신이 글 쓰는 것을 방해받았다고 여겨져서 그랬을까? 왜 울어? 하고 놀랐다가 어느 순간 아이의 평소 과장된 감정 노출에 나 역시 짜증이 올라왔다.

 

도대체 이 아이들 속에 어떤 게 그리 가뜩 쌓여서 저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아이는 왕따였다. 다들 아이를 싫어한다. 본인도 안다. 그러면서 더 열심히 친구들 무리에 섞이려 애쓴다. 돈도 많이 쓰고 양보도 많이 하고 배려도 늘 먼저 한다. 그러면서도 억울한 것이다. 그만했으면 알아줘야 하는데 점점 그 친구들은 아이를 피한다. 왜 그런지 본인도 안다. 안다고 여기지만 모른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산다. 힘에 겨운 일이다. 나는 아이가 울게 내버려두었다. 울다 지쳐 뜬금없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더니 또 눈물이 줄줄 흐른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아니 그 누구보다 주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사람과 사건과 현실 앞에서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0-31).” 자랑할 것은 주 안에서 할 것뿐이다. 이로써 나를 더욱 주 앞에 세우심이다.

 

다섯 번째,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산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그 길을 내게 보이신다.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때론 지겹다. 대체 왜 이런 애들을 신경 써야 하나싶다. 한 애는 너무 눈물이 안 난다며 냉랭한 자신의 마음을 자랑삼아 떠벌였다. 그러다 분이 겨워 구입한지 얼마 안 되는 아이폰 신형을 집어던져 액정이 깨지고 통화가 어렵다. 평소에 차가운데 그 안에 불이 있다.

 

우리들로 하여금 이 아이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같이 느끼고 감당하게 하시려고, 좁은 문으로 인도하신다. 교회 월세를 내야 하는데, 생각지도 않게 한 아이엄마가 밀린 교육비 가운데 일부를 부쳤던가보다. 아내는 신기해하며 하필 그때 딱, 입금이 된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의당 받을 수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 형편을 아는지라 이게 다 주의 것입니다, 하고 주께 돌리고 난 뒤에는 그처럼 사사로운 일도 큰 은혜가 된다. 마땅하다고 여겼던 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아내는 저녁에 마중을 나와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울었던 아이 일로 마음이 어려웠다.

 

이와 같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성경의 가르치심이 놀랍다. 그냥 그래도 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마땅히 힘써야 할 그 이상의 일인 것이다. 아이 둘이 같이 있어서 나는 저 아이의 내밀한 이야기를 물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옆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아이가 더 신경이 쓰였다.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가 없고, 이를 무마하려 여느 엄마보다 병적으로 아이를 간섭하는 외할머니와 친모의 참견에 숨이 차다. 말 그대로 말 잘 듣는 아이인데, 그 안에 분이 넘쳐 순간 울컥, 하면 평소 신주단지 모시듯 하던 아이폰을 박살을 내는 것이다.

 

일부러 그러신다, 싶게도 좁은 문의 그 협소함은 속속들이 저들 사연을 놓고 기도하게 하신다. 딸애가 늦어지면서 아내와 둘이 가정예배를 드릴 때도, 그래서 우린 어쩔 수 없어서도 저 아이들을 놓고 기도한다. 솔직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말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내버려두고 말 일인데도 자꾸 우리 속에 불편함을 더하시니까! 내가 볶여서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곧 이 모든 일들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4-25).” 다른 더 좋은 방도가 없다.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오.’ 내게 두시는 이런저런 사연과 사람과 그에 엮인 여러 일들이 결국은 주밖에 나로 하여금 사모할 수 없게 하시는 것이다. 이 길은 나를 향하신 주의 은혜다. 창세 전에부터 예정하신 일이다. 그 영광의 나라에서 살게 하시려고, 그러자면 그의 영광을 위해서 누리는 수고와 애씀이 기쁨인 것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들로 하여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와 같은 역설적인 길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오늘 스데반은 죽음을 앞두고도 우리의 조상,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그 의를 되새기고 있다. 저의 의는 믿음이었다. 이번 주일 설교원고 초안으로도 잡아둔 내용이다. ‘아브라함의 의’는 곧 오늘 우리가 사는 ‘믿음의 의’다. 이로써 의롭다 하시는 의다. 내 업적에 따른 것도 아니다. 성취도 성과도 아니다.

 

어쩌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행 7:5).”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붙들고 살았던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일이 사역이었다. 뭔가 대단한 목표와 원대한 꿈이 아니라, 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사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사느라 사는 데 겨워 쩔쩔매는 삶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러므로 주께 부르짖는다. 저 아이의 속사정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렇듯 콸콸 눈물을 흘리는 아이를 곁에 두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시 28:1).” 이런 상황의 주의 응답은 확신이라. 내게 두시는 믿음이다.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에서부터,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은데도 묵묵히 또 아이를 맞이하고 주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우리의 바람은 오직 한 가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어제 말씀이 오늘에도 이어진다. 그래서 더욱 주의 집에 살면서 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일. 내가 주께 바라는 오직 한 가지 일, 그것이라. 이는 곧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28:8).” 우리가 저들에게 줄 수 있는 그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붙들고 가는 일이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