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전봉석 2018. 6. 3. 07:08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 9:31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4-5

 

 

건전한 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처음은 모태에서 나올 때 탯줄을 끊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럴 때 밀착은 병적으로 애정을 부른다. 그래서 유아기적의 충분한 애정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새로운 독립을 맞이한다. 사회로 눈을 돌리는 실기다. 이때의 분리는 유년기 때의 독립적인 관계를 얼마나 모범적으로 경험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유난히 거칠게 사춘기를 맞는 사람이 있고 크게 보채지 않고 넘기는 경우도 있다.

 

성인이 되어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과정이 모두 같다. 애착과 분리는 적당히 반복되고 진행되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크게 마찰이 없다. 퇴원한 아이로 인해 그 엄마는 꼼짝을 못한다고 했다. 한 시도 떨어지려하지 않고, 한쪽은 두려움을 호소하고 한쪽은 혹시나 하는 염려를 놓지 않고 있다. 청소년센터에서 상담을 갖고 있고, 미술심리치료를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지나치게 돌보는 밀착은 애착을 넘어 집착을 이룬다. 또 하나의 자기애다. 이를 종종 부모들은 사랑이라 주장하지만 서로의 퇴행만 되풀이 될 뿐이다.

 

고통이 복이라는 데 다들 의아해한다. 탯줄을 끊는 분리의 고통에서부터 성장기에 부모와 자식의 적당한 외면과 존중이 소외라는 고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제라도 아이의 격한 애착은 병적인 것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여전히 그러지 못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끔찍한 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실은 자신의 애정관계 또한 자식에게 기형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이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바울 되는 과정의 획기적인 고통을 그리고 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9).” 앞서 강렬한 빛이 있었고 소리가 있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3-4).” 그런데 그 소릴 누구는 듣고 누구는 듣지 못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7).”

 

저의 앞을 가로막은 이는 저가 박해하던 예수시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이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은,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 14:33).” 되풀이 되는 이와 같은 여정을 끊는 일이다.

 

저 아이의 경우 실은 그 아버지의 성향이 그대로 이어졌고, 이는 또 조부모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일이었다. 폭력이 난무하고 서로의 반목이 이어지면서도 그 어떤 밀착 관계는 건전한 분리를 이뤄내지 못하여서, 조모의 도박 빚을 조부가 갚고 그 값으로 조부는 조모를 폭행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아이 아버지는 일찍이 자해를 시도하였으나 외면당한 셈이었다. 이를 사랑의 고백으로 활용하여 결혼한 셈이니, 어떤 성과가 있었겠나? 늘 저는 그 부채감으로 아내의 등쌀에 그 가정에서 그림자 같은 사람이 된 것이다.

 

정당한 고통을 마다할 때 ‘광야 40년’은 세대를 이어 되풀이 된다. ‘출애굽’은 반드시 열 가지 재앙이라는 끔찍한 고통을 지나서 이루어진다. 특히 부모로서 자식으로부터의 정당한 분리는 그래서 쉽지 않다. 사랑에 있어 과잉보호가 그 대표적인 그릇된 모습이고 이는 또 아이러니하게도 방임이나 방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화풀이 하듯 놓아버리는 일로써 ‘네 맘대로 해!’ 하는 식이다. 아이와 좀 떨어져야 한다는 말을 차마 해줄 수 없었다. 의당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서로가 거듭 만들어내어 재창조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악순환이다.

 

성경의 기본 원리는, 고통은 축복이다. 이를 보증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적정한 분리를 예고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두려움이 따르는 건 당연하다. 여기서 주님이 그냥 죽으신다면 저를 따르던 남은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만일 어쩔 수 없어서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았다면, 떠나실 수 없었다면? 과연 우리의 관계는 어땠을까? 예수님도 그 마음을 감추지 않으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이에 따른 정답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는 것이다. 이를 참아야 한다. 참는 것이 주의 영광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딤후 2:10).”

 

아이가 늘 붙어 있어서 통화도 못한다는 소리에 뭐라 더 내가 나설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음 쓰여 주께 구하는 일이야 내게 맡기신 중보였으나, 나서서 오라하고 가라하고 할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께서 필요한 때면 붙이시거나 떨어뜨리시거나 하실 것을 생각하였다. 고통 없는 분리는 없다. 혼란은 필수적이다. 제자들은 당연히 흔들렸고 저마다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하였다. 졸지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고통 없이 주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재간은 없다. 여기서 고통이란 자기애로부터의 분리다. 가장 미련하면서 대단하였던 고집은 애굽의 왕 바로다. 저는 끝내 열 가지의 재앙을 당했다. 마지막에 아들도 잃었다. 끝내 홍해에 수장되면서 생을 끝냈다. 못 보내겠는 것이다. 우리 안의 애착은 집요하기가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미련하다.

 

오전에 오는 중3 아이가 또 늦는다고 문자를 했다. 한 번도 제 시간에 오는 적이 없다. 무려 한 시간이나 늦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여, 오늘은 그럼 안 와도 되는 걸로 답을 하였다. 그래놓고는 마음이 쓰였다. 그냥 그래도 오게 할 걸 그랬나? 그러려니 하고 말 걸 그랬나? 우리 안의 어떤 밀착 관계는 거의 병적이라. 이를 사랑이라 여기면 당최 감당이 안 된다. 애착만큼 단호해야 하는 것이 없다. 끊어질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내 안에는 항상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싫은데 싫단 소릴 못하고 휘둘리던 때, 하면서도 내 안에 불평은 진정으로 저를 사랑하게 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과정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인자하심을 믿어야 한다. 나아가 저의 사랑을 입은 나의 자녀를 또는 우리의 관계를 믿어야 한다. 그러기에는 약간 미진한 것 같아서 되돌아보는 게 집착이다. 롯의 처와 같다.

 

우리의 의는 언제나 동일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그러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우리는 주를 믿음으로 정당한 분리를 감행할 수 있다.

 

서로 의가 상해 갈라지는 게 아니다. 사랑하니까 놓아주는 일이다. 놀아둬야 저를 향하신 주의 사랑도 확신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늘 날 우리의 모성애라는 것이 집착을 사랑으로 둔갑시켜 이를 애정이라 여겼다. 아이는 그 부모로부터 적당한 때에 분리하지 못하면서 그 날개는 기능을 잃어 날 수 없는 새로 살아간다. 날 수 없는 날개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짐이 된다. 이 복음의 의는 믿음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때 어김없이 자아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며 굴림한다. 아이는 엄마를 조종하고 아이엄마는 아이의 현재 상태를 이유로 그와 같은 밀착관계를 더욱 완고히 한다.

 

각자 저마다의 자기 날개를 잃어버린 셈이다. 날지 못하니 서로 뒤뚱거리며 엉겨 다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 곧 나아지면 그땐 꼭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우리는 늘 이와 같은 오해와 터무니없는 희망을 내세우며 온전한 분리를 뒤로 미룬다. 그에 따른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하나님은 미쁘시다. 나의 그 어떤 수고와 애정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신다. 자식도 내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분리는 죽을 것 같으나 살리는 일이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 21:14).” 내가 뭐라 한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더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내가 붙드는 것도 떼는 것도 아니다. 주의 뜻대로. 이내 이 모든 여정은 우리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그러므로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4-5).” 이로써 내가 주께 바라고 붙드는 한 가지 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