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사도행전 8:35-3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29:11
아이는 떠듬떠듬 성경을 읽는다. 그 의미를 물으면 열에 아홉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뭐라 설명을 해주면 아멘, 하고 좋아라한다. 스물두 살. 아이를 두고는 그게 다 지능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걱정들 한다. 나는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한다.’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는 성령이 하실 일이다. 집중력도 상당히 저하되어 연신 하품을 해대면서도, 피곤하면 그만할까? 하고 물으면 아니에요, 더해요. 하면서 아이는 성경을 마저 읽는다.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우리가 같이 요한복음을 다 읽으면 학습세례를 받자고 하였다. 같이 성경을 읽고, 한두 구절을 글씨로 쓴다. 모처럼 바쁜 와중에 아이 이모가 와서 점심을 샀다. 차를 한 잔 하고 바삐 돌아가야 했지만, 이 모든 일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아내는 내가 아이가 오면서부터 활기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말이 많아졌다는 것인데, 그러게.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듯 마음이 기울면 말이 나온다.
오늘 본문에서 돈을 주고 이와 같은 능력을 사려 한 마술사 시몬과 성령의 이끄심으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풀어주고 세례를 베푼 빌립이 눈에 띈다. 베드로는 시몬을 꾸짖었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21-22).” 성령이 주도하시는 일과 성령을 주도하려는 일의 차이는 엄연히 다르다.
마술사 시몬은 회개하고 돌이켜 성령을 받았을까? 두려움에 떨며 말하였으나,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24).” 다음 이야기는 생략되었다. 추론하건데 그 앞을 모면하고는 어딘가에서 저는 여전하였을 것이다. 나름의 기술인 저의 마술이 이를 짐작하게 한다. 상대적으로 빌립은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26).” 하필 또 광야다. 그런데 본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5-6).” 저는 앞서 주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하실 때,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 주의 능하심을 외면하고 계산적으로 판단하였던 이다. 성령이 주도하신다는 일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의 행사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드러지게 달라진 사람이 바울이 된 사울 아닌가?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앞서 스데반이 죽은 일에 대해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1).” 또한 그로 인하여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1).” 때론 이처럼 성령의 주도하심이 우리의 상식을 초월한다.
아이의 이런저런 관심이 나는 맹랑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순수하고 맑아서다. 주를 바라는 마음이 자신을 연약하다고 느끼는 만큼 더욱 간절하다. 그 의미를 ‘정상적으로’ 해석할 줄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를 민망해하고 또는 어색해한다. 그런데 왜 주님은 내게 ‘좋은 느낌’을 넣어주시는 것일까? 마술사 시몬처럼 나름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주의 뜻을 모색하려는 사람들의 이해는 역겹다. 누구는 그래서 성경을 원어로 읽고 공부한다. 어디서 어떤 해석의 오류가 있는지 서로 토론하고 연구한다. 배우기도 많이 배운 이들이다.
주기도문을 영어로 암송하고 라틴어로 풀어내어 이해한다. 한 자 한 자 그 의미를 주목하여 어떤 능력으로 주도하기를 원한다. 종종 유태인들의 성경암기법이나 그 삶의 투철한 신앙을 설명하면서 그러한 노력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한다고 여긴다. 글쎄. 나는 아이의 장황하고 앞뒤 맞지도 않는 설명이 훨씬 더 기특하고 즐겁다. 그런 걸 바로 설명해주면 아멘, 하고 아이가 화답하는 일이 말이다. 그저 지능이 낮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성령의 주도하심과 성령을 주도하려는 삶은 엄연히 다르다. 마술사 시몬은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켰을까? 나는 말씀 앞에서 궁금하기도 하였다. 마술은 죄의 형질 가운데 하나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행 19:18-19).”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스스로 자구책을 강구하였는지 알 것 같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치심과 그 소망을 따르는 일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4:19).” 사람들의 기호나 어떤 수고의 학문이 이를 알게 하지는 않는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5:29).” 이에 대조되는 것이 마술이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8:19).”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의 수고와 애씀이 더 확신을 더하기는 한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행 19:13).” 종종 배움이 많은 신앙인을 보면 뭔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진다.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꽉 막혀 있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나는 그래서 지금 이 아이의 순수함에 기쁨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엄중한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단순하게 읽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나는 종종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에 놀란다. 그러니 어린아이처럼 굴 수는 있어도 그게 시늉일 뿐이지 실제 내 안에는 계산이 앞선다.
내가 아이를 볼 때 이와 같은 말씀의 의미를 새삼 이해할 것 같다고 하면 다들 풋, 하고 웃는다. 우리는 얼마나 나름의 마술을 신봉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배움을 자부하고 또는 어디에 속한 그 그룹을 신뢰하며 서로를 의뢰하는 정도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순수함을 능가한다. 그러느니 스스로들 열심을 다해보는 게 낫다고 여기는 경우다. 자신들의 열심이 자신들의 마술에 심취하게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차라리 한숨이 날 정도로 순진무구한 아이의 ‘아멘’이 훨씬 더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같다.
여느 날보다 아내가 일찍 수업을 끝냈다. 아이들 개교기념일이어서 일찍들 오기도 했지만, 한 아이가 종일 집에 있다가 잠을 자느라 깜빡해서 말이다. 알고 보니 전날에 글방에서 와락, 울어버린 그 아이였다. 다들 개교기념일이라고 끼리끼리 놀러 다니는데 어째서 그 아이는 혼자 집에 있다가 잠이 든 것일까? 아이가 왕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 것은 몰랐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고 누구도 부를 수 없었다. 그게 참. 전에 같으면 그런가? 하고 말았을 텐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시 29:1).” 우리에게 더하신 주를 사모하는 마음이 권능이다. 그 영광과 능력을 주께 돌린다는 것은, 아이를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2).” 우리 곁에 두심으로 우리로 신경 쓰이게 하시는 이의 이름으로 아이를 생각하고 위하여 어찌할까? 주께 묻는 일이다. 더는 우리 곁에 두지 않으시면 모를까! 왕따, 그 지긋지긋한 신경쓰임을 내가 잘 안다. 그래서 애쓰고 수고하는 마음이 얼마나 고단하고 서러운지 말이다. 그래서 전날에 그처럼 펑펑 울었구나!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3).” 주께서 들려주시는 물 위의 주의 소리다. 영광의 우렛소리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4).” 내 안에 들려주시는 소리라.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5).” 나는 저 아이가 어느 교회를 다니고, 그 부모도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소릴 들어서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저들의 열심이 아이를 외롭게 하는가.
아이 아빠는 교회 음향기기 설치와 이를 판매하는 기술자라고 들었고, 엄마는 어디 보험에서 높은 지위에 있다고 들었다. 아뿔싸. 스무 살이 넘은 아이 오빠는 이틀이 멀다하고 말썽이었고, 아이는 조증과 울증이 심하였다. 우리 곁에 ‘마술사 시몬’이 참 많구나! 행여 오늘 우리의 사역이 또한 그와 같지 않을까?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주님, 하고 나는 오래도록 여기서 생각이 머문다. 마음을 주셨으면 또한 감당할 수 있는 사랑도 주실 것을 구한다.
고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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