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사도행전 12:24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편 33:16-17
말씀은 때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헤롯이 교회 중에 몇 사람을 죽이고 이를 유대인들이 좋아하자 요한의 형제 야고보도 칼로 죽였다. 베드로도 잡아 옥에 가두었다. 정황은 잔악하기 이를 데 없고 그 끝 간 데 없는 무도함으로 주를 믿는다는 게 허망하기만 한데,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해진다니! 베드로는 천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었다 살아나고 몇몇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숨어 있었다. 저들로 베드로가 풀려난 것을 그의 천사가 왔는가, 하였으니까.
사람의 잔혹성에 대하여는 인류 역사상 곳곳에 자행된 것을 안다. 1915년 터키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집단 사살하였다. 독일은 유태인을 학살하였고, 소련의 강제수용소는 악명이 높다. 1994년 르완다의 대량 살육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은 2차 대전 막바지 600일 동안 중국, 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에서 양민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오늘날에도 여기저기 테러가 끊이지 않고, 팔레스타인 땅에는 여전히 자신들의 명분을 내세워 사람들은 죽고 죽이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
엊그제 도시 한복판에서 20대 건장한 청년들 네 명이 50대 부부를 집단 폭행하였고, 이는 단순한 시비 끝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는 부모를 불신하고 부모와 자식은 반목한다. 모 백일장에서 글짓기 입선을 하여 서로 축하하는 가운데 아이는 그런 사실을 부모와는 공유하지 않으려 했다. 상금 30만원을 두고도 아이는 부모를 믿지 못하였다. 다음 주 시상식에 부모를 초대하지 않을 것이라 하여 나는 아이를 설득하였다. 아내는 아이엄마에게 연락해서 한껏 축하해줄 것을 당부하고, 그 대회가 그래도 나름 규모가 큰 대회였고, 아이가 좋은 성과를 낸 것이니까 많이 칭찬해주라는 말에 아이엄마는 뜬금없이 무슨 내용을 썼느냐고 묻더란다.
혹시나 자신이 이혼하고 그 가정에 두 부부는 여전히 같이 살며 성이 다른 언니와 말 한 마디 못하고 사는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부끄러워서 그런가. 나는 순간 아이가 왜 그처럼 집에는 알리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이아빠는 왜 그런 일을 알리지 않았느냐며 역정을 냈다니까, 아이야말로 새중간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구나. 기뻐해도 돼, 좋아해도 돼. 나는 시무룩한 아이에게 말했다. 좋아요, 기분 좋아요. 하면서도 아이는 덤덤하니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하였다. 얼레고 달래며 아이의 마음을 토닥이다 안쓰러웠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치부가 아이 글을 통해 드러날까 신경 쓰지 정작 아이의 속이 문드러지고 있다는 데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하였다.
나는 오늘 본문을 읽다, 말씀 앞에 당황스럽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 12:24).” 어떻게 지금 이 상황이 그러한가? 그리하여 저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복음은 아시아로 넘쳐나고 온 인류를 향해 전진하였다. 복음은 믿음으로 모두를 한 민족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영적인 유대인이 되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 결국 주의 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실제 경건한 자로 사는 일은 매우 공격적인 삶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복음은 시나브로 흘러들어온 게 아니다. 복음을 가지고 믿음을 붙든 선교사들의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시도가 아니었다면 이 변방의 나라, 미신이 판치고, 구한말의 어지러운 정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조선 반도에 어찌 주의 복음이 들불처럼 번질 수 있었겠나.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분명한 이유,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삶은 그저 안이함으로 막연한 데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도 늘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교회로 오게 하고 주의 말씀으로 건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그렇게 여의치가 않은 것이다. 다 좋은데 그것만은 싫다고 하는 아이에게 더는 어떻게 다가갈 수 없어서 막연하다.
소심하게도 나는 노트에 아이 이름을 쓰고 주님, 하고 부른다. 부모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아이를 기뻐할 줄 모르게 하고, 그러는 자신을 그저 내버려두라는 듯 시큰둥할 따름인데.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8).” 성경은 내게 너그러울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기를 힘쓰라는 것이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그 본은 하나이다.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2:7-8).” 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따른 전투다. 내 안에 이는 아이에 대한 불편함, 어떤 짜증에 대하여도 싸워야 하는 일이다. 속이 좋아 아이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아니다. 왕따 당하는 아이는 다 그럴만한 아이다. 그래서 왕따인지 왕따로 지내느라 그리 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런 아이들’의 되바라진 고집은 정말이지 치기 떨릴 정도이다.
내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임이란, 곧 주를 섬기는 일이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저 아이와 그런 부모를 상대하는 일이 때론 화가 나고 속상하고 그래서 더는 상종도 하기 싫지만,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성경은 되레 나의 뒤통수를 치신다. 그 일이 곧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보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엄마를 위해 하는 일도 아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이 일을 행하라고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게 주신다. 우리로 항상 넉넉히 착한 일을 넘치게 하시려고 말이다. 곧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는 주가 이루신다. 그리 약속하고 계신다. 우린 다만 여기에 있을 뿐이다. 저 아이를 보내시는 이가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저 아이를 품을 수 있게도 하신다. 그 엄마의 심정도 헤아리게 하신다. 아내는 아이엄마와 통화하고 대뜸 무슨 내용을 썼느냐고 묻는 그 심정을 의아해하면서도 이해하였다.
일부러 나는 더 아이에게 그런 자신의 치부를 당면하게 한다. 글로도 쓰게 하고 그 일을 두고 오래 생각하게도 한다. 감추고 숨기면 썩는다.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 드러내어 당면하면 생각보다 견딜만하다. 그래서 뭐? 나는 아이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집안 사정이 어떻고, 부모가 어떻고, 자신의 건강이 어떻고, 지금 처한 현실이 어떻고! 그래서 뭐? 그래서 공부 안 하고, 그래서 시무룩하고, 그래서 부정적이며, 그래서 수고하고 애쓰는 따위의 자기 열심이 뭐? 결국은 그게 너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나는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헤롯이 미쳐 날뛰며 마치 모든 권세를 쥐고 흔드는 것처럼 교회를 핍박했지만, 결국 저는 보잘것없는 인간이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그 정도가 전부인 주제에, 부모랍시고 또는 자기 고집과 아집을 부추겨 끝내 자신은 자기 것이라고 우겨대며 사는 꼴이라니! 그래서 뭐? 온갖 이유와 변명을 늘어놓은들 벌레에게 먹혀 죽을 정도의 한줌 인생도 아닌 것을! 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24).”
아, 이 역설적인 복음의 아름다움에 황홀할지경이다. 그리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다. 이런 몸을 이끌고,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면서, 이밖에 달리 손 쓸 수 있는 능력도 없지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내가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내게서 나는 일도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 저 아이를 내게 두심이 말이다. 그러한 부모를 대하며 속상해하다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일이 말이다. 이는 나로 하여금 결코 나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이다. 결코 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렇지. 이와 같은 마음도 그 출처는 주님이실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시 33:1).” 우린 다만, 주를 즐거워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13-14).” 주가 제일 잘 아신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15).” 그러므로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16).” 이 명료한 사실 앞에 아멘 한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17).” 이에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20).” 오직 주만으로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21).” 곧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22).”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 12:24).”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0) | 2018.06.08 |
---|---|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0) | 2018.06.07 |
복이 있도다 (0) | 2018.06.05 |
그러하여도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0) | 2018.06.04 |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0) | 2018.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