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사도행전 14:22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시편 35:1
이스라엘이 구별되는 것은 다른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거역하고 저들 신을 섬기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이 구별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른 다른 점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 사역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속량할 수 없다는 데서 시작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로마서를 묵상하며 그 말씀을 본문으로 삼고부터 뭐랄까, 더욱 선명한 성경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래저래 마음은 울적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그리 크게 나를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것도 그 일이 되어짐에 따른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게 되면서다.
모처럼 필리핀 동생이 왔고 아버지와 함께 어디로 낚시를 갈까 하고 장소를 함께 고르고 있을 때의 어떤 서글픔, 또는 부러움 따위가 이제는 순응보다 크지 않다. 오히려 아이들이 한꺼번에 오는 날이어서 되레 정신이 없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리 여기고 주어진 일에 묵묵할 수 있는 게 복이다. 덕분에 로마서 5장 본문을 여러 번 읽을 수 있었고, 그 의미가 새로웠다. 이번 주일 본문이어서 그리 시간 날 때마다 짬짬이 조각 글을 썼다.
우선은 기본 전제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는 마땅한 권리이면서 의무다(롬 5:1). 이는 “또한” 그럴 수 있는 게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룬 게 아니라, 그리 여겨주신 일이다. 이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그럴 수 있는 것이다(2). 다른 사람들과 구별됨이다. 이는 ‘어떠하든지’의 몫이다. 그래서 더욱 강화된 말씀이 뒤따른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3).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은 위선적이거나 실제 그렇거나, 거짓말이 아니라면 둘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4-6).” 이와 같은 단계적인 성장을 보이는 게 믿음이다. 인내는 이론이 아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설명으로 알게 할 수 있지도 않다. 직접 겪어야 자신의 인내를 알 수 있다. 호언장담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시련이 닥쳐봐야 안다. 평온할 땐 다들 좋아 보인다.
기어이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 참거나 죽거나, 이겨내거나 무너지거나, 견디거나 포기하거나! 그러는 중에 인내를 이루는데 이를 연단이라 한다. 한두 번 잠깐 왔다 마는 정도의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연단이란 마치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두드려서 더욱 단단하게 하는 일이다. 쓸모없던 것에서 이물질을 태워내고 다지고 벼려 쓸모 있게 만드는 일이다. 한두 번 그러다 마는 것으로는 어림없는 게 연단이다. 귀찮고 견디기 어려운 일로 시달리는 게 연단이다. 인내는 그와 같이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가운데 어찌 인내할 수 있겠나? 그와 같은 연단으로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녹슬고 쓸모없어 버려진 쇠붙이였는데 이를 불에 담갔다가 두드리고 두드리기를 거듭하면서 어떤 형태가 나오고 주인이 바라던 도구로써 그 모양을 갖춰가는 것이다. 이에 그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이 특권이다. ‘어쩌다 어른’이 된 게 아니다. 어쩌다 이 땅을 살게 된 일도 아니다. 어쩌다 저 아이를 맡은 것도 아니고, 어쩌다 이런 육체로 사는 일도 아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를 알 게 하시는 이의 특별하신 은총이다(5).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할 만한 것도 없는데 우리 안에 이는 이 마음이 기적이라. 이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내가 그만한 능력이 되어서가 아니다.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을 가져서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 이 황당한 사실이 은혜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7).” 내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죄인지 다 아는데, 용서 받을 수 없는 추함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잘 아는데, 그런 쓸모없는 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된 일이다. 의가 있고 어떤 선이 있어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 죽으신 게 아니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이다. 저들과 다를 바 없이 주를 배척하고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살던 때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나를 위해 그러하심으로 하나님은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나의 의는 없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전적으로 내가 한 일이 없다. 그러니 이제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순간 이미 이루어진 과거형시제에서 미래형시제로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놓으신다(9). 왜 그럴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10).”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받을 것이라니! 다소 이율배반적인 논리 앞에 당혹스럽다. 이럴 때 이제 말씀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일은 즐겁다. 문득 잘 연마된 농기구를 떠올린다. 혹은 노련한 무사의 검을 상상한다. 처음 그것이 만들어질 때, 대장장이 손에서 두드려지고 다시 불에 시뻘겋게 달구어져 더욱 더 단단해진 쇠를 그려본다. 아하,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여기서 이 말씀을 적용함으로 그 의미가 새롭다.
괜히 만든 게 아니라면 그에 합당한 쓰임은 당연하다. 본래 자신이 알던 형태나 모양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형질은 같으나 이제 그 쓰임이 달라졌다. 이 십자가는 주의 남은 고난을 참여하는 일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저 팔자소관을 운운하며 운명론자처럼 사는 순종이 아니다.
나는 의식적으로 저 아이를 본다. 새로운 마음으로 아이를 대한다. 저의 상한 영혼을 생각한다. 늘 공부 못하는 아이. 어눌하게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도 자기 고집만 센 아이. 금세 싫증내고 토라져 주변을 짜증나게 하는 아이. 덩달아 같이 놀던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는 나 몰라라 하는 아이. 무책임한 아이. 그런 아이 뒤로 무분별한 엄마가 있었고, 저의 막무가내식 요구와 참견과 신경질은 아이를 더욱 변형시키고 있었으니. 그런 아이의 이런저런 사연과 간절함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말 한 마디라도, 사탕 하나라도.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 마치 끙끙 앓듯 풀리지 않던 문제를 풀어 그 답을 알았을 때의 시원함 같은 마음이 들었다. 오늘 본문에서 마치 바울은 나에게 직접 들려주는 것 같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마음을 굳게 하라. 믿음에 머물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붙들라. 환난은 필연이나 그것으로 더욱 굳건하여진다. 우리는 이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다.’
주가 다투실 것이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시 35:1).” 나의 대적들과 맞서시는 이가 억눌리고 외면당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다. 오는 28일까지 ‘가족’이라는 주제의 수기공모가 있어 관심 있는 아이에게 썼으면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망설인다. 두려운 것이다.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으로 감겨버리는 아이를 보며 나는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2).”
다만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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