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전봉석 2018. 6. 10. 07:13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사도행전 16:31-32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편 37:23-24

 

 

 

주일에 저를 교회로 나오게 하는 일은 내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면 그게 아이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다만 내게 보내시는 동안 나는 주를 바람이다. 가르치고 일러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음에 대하여 증거 하는 삶이어야 한다. 아이엄마가 아이의 입선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고자 왔다. 너무 평범하여서 나는 의아하였다. 상상하기로는 괴팍하고 어질지 못하여 그의 생김도 흉하지 않을까 하고 있었나? 갑작스런 저의 방문에 놀랐다. 평범한 여느 엄마의 자잘한 참견과 잔소리가 보태질 따름이었다.

 

아내는 딸애와 함께 어느 아이 결혼식장에 갔다. 내가 갔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 대신들 다녀왔다. 사진으로 본 아이의 아버지가 너무 멀쩡하게 생겨서 그것도 의아했다. 녀석이 아버지를 닮아서 인물이 좋았던 거였다. 마침 아이와 잠깐 통화를 할 수 있어서 축하를 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가 와서 글을 쓰고 있어서 그런 내용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주어진 삶을 사는 거다. 주신 이는 선하시다. 때론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서운하고 속상하고 답답하다 해도 주님은 선하시다. 덕분에 다른 날보다 길게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있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행 16:31-32).” 그럴 수 있기를 성경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의 일로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아이를 구원할 수는 없다. 교회로 이끌어올 수도 없다. 주말에 하루는 좀 쉬어야죠. 아이의 거절에 더는 권하지 않았다. 주가 이끄시는 동안 다만 나는 아이 앞에서 주를 증거 하는 일이다. 언니의 침묵, 엄마 아빠의 이혼 사실과 불편한 동거, 그런 가운데 서로의 반목과 어색함. 하필 이번 주제도 ‘가족’이었다.

 

나는 그와 같은 불편한 동거를 그래서 아이가 힘들어하는 어떤 어색함에 대해 오히려 다른 각도의 해석을 더해보았다. 더는 못 살겠다, 하고 이혼까지 한 아빠가 그럼에도 아직 집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자녀에 대한, 가족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는 아닐까? 서로 성이 다른 남매의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도 대학을 다니는 언니가 집을 나가지 않는 이유는 그래도 가족을 생각하고 원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못 살겠다며 등을 돌렸으면서도 무던히 다시 합쳐보려는 엄마의 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를 사랑이라 여기는 막내딸 중3 아이의 시각으로 보는 가족의 풍경이면 어떨까?

 

하나님은 우리가 불행하라고 불행을 주시지는 않는다. 그 불행을 통해 본래 간직하며 누려야 했을 행복의 진가를 알게 하신다. 나는 아이가 불행하다고 표현한 그 현실을 역으로 이해하며 그리 설명해보았다. 한데 우리의 그 행복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고 한심한가?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 37:2).”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바라고 구하게 되는 참된 행복의 근원에 대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3).” 나는 아이에게 이를 알게 하고 싶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4).” 주말엔 피곤해서 쉬어야 한다는 아이의 단호한 거절에도 나는 기다릴밖에. 나오고 안 나오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늘 보면 나는 이 벽을 느낀다.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오를 수 없는 벽이다. 그럼에도 아이가 글방에 오고 이렇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을 회피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하니 그것으로도 감사하였다. 보내시는 동안은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일이었다. 옆 사무실 사장은 아이 하나 때문에 토요일에도 일을 하는가? 들여다보고 갔다.

 

어느새 지켜야 할 의무는 바라는 선택이 되어 더는 괴롭히지 못한다. 새 언약의 경우다. 육의 몸을 벗는 일이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 새로운 일으킴이다. 분명히 나의 마음은 우울하고 슬퍼야 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는 않았다. 아이 결혼식에도 가보지 못하고, 누가 온다는 말에 쩔쩔매면서도 또 보면 다 의연할 수 있었던 게, 새 힘이다.

 

내 앞에 두시는 즐거운 선택이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전에는 마지못해 해야 하고, 해야 하는 일이어서 고역이었는데, 이제는 이 일들로 인해 크게 억매이지 않는 것이다. 곧 이제는 분명한 약속을 알기 때문이다.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16).”

 

오늘 다윗은 이를 확신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3-24).” 그는 나의 주시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25).” 이는 내가 살면서 누리는 이 평화가 나의 아버지가 일구어놓은 길을 갈 수 있어서이다. 나의 형제들이 함께 바라고 구하는 그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버림당하지 않았다. 나는 걸식하지 않으며 나의 자식도 그러할 것이다. 이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이루어지는 약속이다.

 

약속,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그러므로 누가 지옥에 간다면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 괴팍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 아니다. 이미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실 수 있는 건 다 하신 바 된 사랑이다.

 

그러니 천국에 대한 약속의 복은 안이한 자의 막연한 선택에 의한 게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사느라 드는 피로감을 호소하는 아이에게 나는 그것이 결코 불행한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더 어렵고 힘든 처지에서도 누군 이겨내고 누군 진다. 누구는 바로 서고 누구는 자빠진다. 지금 처한 그 상황을 불행으로만 느끼면 한도 끝도 없다. 그것으로 바른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라고 그리 두시는 이가 계셨으니, 하나님은 우리가 불행하기를 바라고 불행을 허락하시는 게 아니다.

 

아이는 이런 나의 결연한 모습으로 무얼 느꼈을까? 처량하게 제 발로 아이 결혼식에 참석도 못하면서 통화로나마 축하하는 선생의 가련한 모습에서 무얼 보았을까? 하필 아이가 앞에 있는데 아내는 통화를 연결하여 그리 되었다. 축하하고 축복하고 잘 이겨내며 행복하였으면, 하고 바라는 나의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었을까? 결국 그처럼 증오하던 친부와 계모를 모시고 결혼을 하고, 저의 친모는 결혼식에 오지도 못하고 그 우울증에 겨워 홀로 집에 남겨져 있었다니 그 속은 또 서로 어떠할까? 나는 아이에게 그럼에도 꿋꿋할 수 있기를. 불행이 아니라 바른 행복을 알게 하시려는 주의 뜻임을.

 

나 혼자 애태우듯 아련하였는데 그 앞에 우리 중3 아이가 앉아 있었으니, 마치 잘 짜여진 구도의 어떤 연출을 보는 듯하였다. 하나님의 계획은 어떠하신가?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지옥은 마땅히 그리 선택한 이의 몫이고 천국은 나의 어떤 선택도 수고도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주의 은총이 아니시면 내가 과연 저들을 안타까워하며 주의 이름 앞에 호소할 수 있을까?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7:30-31).” 주를 바람이다. 그러므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5-6).” 그러므로 그럴 수 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7).” 주가 이루신다. 불행을 운운하던 아이에게 나는 보란 듯이 우리 하나님은 외과 의사 같이 우리 마음을 수술하고 계신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음의 할례란 그런 거였다.

 

어떤 것보다 행복이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16).” 이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23-2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