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사도행전 18:5-6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시편 39:9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다. 그럴 힘도 주신다. 굳건하라.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계 3:2).” 안이하게 여길 때 시험은 온다.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 그래서 주만 바라고 ‘말씀에 붙잡혀’ 살게 하시려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놓아두신다. 내가 알기로 나는 참 안이한 사람이라.
아이가 제시간에 와서 같이 요한복음을 읽었다. 약을 바꾸었다며, 어떻게 그리 된 것인지 장황하게 설명을 해주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능검사도 새로 하기로 하였다는데, 그런저런 처지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디 간단한 일이라도 있으면 아르바이트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녀석은 전에 빵공장에서 일했던 급여가 얼마 들어왔다며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같이 내려가 잔치국수를 먹었다. 돈이 생기면 구매욕구가 일어 좀이 쑤신다. 본인도 안다. 주체할 수 없을 뿐이다.
서둘러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았다. 저 나이 때, 저 시절을 겪어야 하는 일이겠으나 그 먼 길을 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이엄마의 억장이 무너질 듯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았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 모든 상황도 그러할 것이니.
오후께는 노인이 건너와 이런저런 말을 하였다. 이상하지? 조금 모자라다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훨씬 더 즐겁다. 저이는 말하다 보면 술 얘기, 친구 얘기, 돈 얘기, 살아온 구구한 이야기들이다. 그냥 가만히 들어주는 것도 사역이라. 요즘은 그래도 아침마다 문서작성을 조금씩 배워 글을 쓴다. 조금 더 익숙해지면, 자서전을 좀 써보시라 권하고 있다. 돌아보면 주께서 어찌 인도하시고 함께 하셨는가, 저만 모르고 있는 사실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어느 인생이 순탄하기만 할까. 모진 세월만큼 자기 할 말이 참 많은 법이어서 우리의 ‘선택적 추상화’는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한다.
쉽게 말해 <‘~ 해서’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걸 거야!> 하는 방어기제다. 우린 늘 그런 사고에 시달린다. 돈이 없으니까 나를 무시하나, 배우지를 못해서 나를 우습게 여기는 거야, 하는 식으로 자신을 단단히 무장하게 하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러는 동안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외면한다. 부정적 편향성을 보인다. 왜곡하는 것이다. 뭐라 하기 조심스러운 게 그처럼 멋대로 해석해서 역기능적으로 사고하기 일쑤다. 그로 인해 열등감이 커지고 자기비하에 시달리기도 한다. 아무도 뭐라 한 사람이 없는데 저 혼자 긴장하고 화가 난 인생을 산다.
불현듯 노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성경은 늘 깨어있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돼 있다고 하신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이는 우리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헤치고 억척스럽게 벌어서 집 세 채를 자기 앞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쪼들린다. 비로소 못 배운 게 한이 되었고, 이게 다 누가 나를 ‘~ 해서’ 그리 대하는 것인가 하여 허세를 버릴 수 없다. 모든 정서장애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그러므로 주의 도우심을 바라라고 하신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주님도 기도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주의 도우심을 구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의 ‘과잉 일반화’다. 자신의 경험을 모든 기준의 잣대로 삼으려 드는 일이다. 노인의 무장을 깰 수 없다. 스스로 살아온 삶에 대한 자기 확신이 강하다.
그러게.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주님이 오늘 내게 이와 같은 이를 붙이시는 까닭은 더욱 말씀을 붙들게 하려 하심이다. 달리 해석이 안 된다. 듣고 권하고 하는 동안 급기야 저의 입에서 ‘가족들보다 목사님이 편합니다.’ 하는 말이 나왔으니, 대체 주님은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것일까? 그냥 하는 소리겠지만, 어제처럼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저의 말들은 듣는 데도 지친다. 문득 저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거였다는 생각!
아이가 와서 같이 말씀을 읽고 아이의 과장되고 허풍 같은 고백을 들으면서 나를 부끄럽게도 하시고, 노인의 옹고집과 자기 확신에 따른 완고함을 묵묵히 마주하면서 이내 나로서는 주를 바라는 길밖에 달리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새삼 주의 도우심만을 구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저의 말을 들으며 내가 구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6-7).”
일련의 이런저런 일에 대하여 내가 꾸미고 더해 어찌 잘해보려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연락이 없으면 나는 그 정도 선에서 기다릴 뿐이다. 누구를 곁에 두신 것이면 저를 위해 나를 세우신 일이면서도 동시에 나를 위해 저를 곁에 붙이신 게 된다. 주가 놓으시는 길이다.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사 35:8).”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오늘 본문은 그것을 명심하게 하시는 것 같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행 18:5-6).” 골목을 굽이 돌 듯 길은 끊어지는가 싶다 이어지고, 이어지기를 넓어졌다 좁아졌다 되풀이 한다. 그럴 때,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 39:9).” 이 모든 일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가끔은 왜 이 사람이 여기 와서 이런 얘길 하고 있나, 싶다가도 그러라고 맡기신 곳이다. 나를 여기 두시는 이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러는 동안 마치 내가 저를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여기지만 실은 그게 아닌 것이다. 내가 주의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였으나 그게 아니었다. 날 위해 주께서 일하신다. 날 위해 저를 오늘 여기 나에게 보내시는 것이다. 이 번잡스러운 또는 힘에 부쳐 지겨울 때도 있지만, 그래서 주의 긍휼하심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는 이 아이러니한 사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
이제 이를 위해 주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는, 은혜. 그러므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내게 두시는 일이다. 비가 내리면서 온 몸이 저려 고통스러웠다. 책상 아래 난로를 켜고 발을 쬐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고, 소파에 누워도 보고 창가를 서성거리기도 하면서. 산다는 일은 사는 일 그 자체로도 값진 훈련이다.
이것이 그저 나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그래서 나는 말씀을 붙든다. 우화 중에 읽은 내용이다. 여우가 길을 가다 잘 익은 포도나무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포도를 따먹으려 해도 키가 닿지 않아 먹을 수 없자, ‘저 포도는 아직 덜 익어서 신포도일 거야.’ 하고 가던 길을 도로 갔다. 나는 종종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여우와 신포도’ 예화를 떠올린다. 합리화하는 것이다. 이 고통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그럼 또 신기하게도 금세 이겨낼 수 있는 새 힘도 주신다.
긍휼하심을 얻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고자 주 앞에 앉는 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게 아니면 내가 어찌 주를 더욱 바랄 수 있을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2:9).” 이 놀라운 맛은 고달프다고 여길 때 더한층 선명해진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내게 악인은 내 속의 원망이다. 불평이다. 입을 꾹 다물어,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2).”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고 찬양하게 하심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때론 나 하나 건사하는 일이 열 사람을 마주하는 일보다 어렵다. 그럼에도 주를 바라는 일,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9).”
그러므로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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