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전봉석 2018. 6. 18. 07:11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사도행전 24:16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시편 45:1

 

 

 

어떤 권리주장도 할 수 없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다. 우리가 주 앞에 나아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찬송할 수 있는 것은 말이다. 본질상 나는 진노의 자녀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그것에 대하여는 일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4-5).”

 

아이가 기쁨으로 축복기도를 받는 모습을 보며 황홀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우린 대수롭지 않게 또는 별로 사모하는 마음 없이 주를 바라고 구하면서 사는지. 혹시 시늉에 그치고 다만 작위적인 만족감으로 즐거워하는 것은 아닌지. 벨릭스는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었다(행 24:24). 혹시 돈이 생길까 하는 궁리도 하였다(26). 그러면서도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가둬두었다. 저의 모습이 혹시 타성에 젖은 우리의 신앙 모습은 아닐까? 어떤 사연을 갖고 우리는 겸사겸사 주 앞에 나온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란, 그 속에 꾀하는 마음이 ‘혹시나’ 하는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우리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이제야 알겠다. 처음 사람 아담은 말했어야 한다. ‘우린 그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이미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라!’ 그런데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는 저의 이 말에 넘어갔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6).” 벌써 다른 세상에 놓인 것이다. 말씀과는 전혀 별개의 세계가 펼쳐졌다. 훨씬 더 나아 보인다. 누가 휴직을 생각하며 휴양림으로 갔다. 성경을 들고 갔으니 기도를 부탁하였다. 특별한 은사를 갈구하는 부류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보다 높은 증명을 바란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총독 벨릭스가 그 단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행 24:22).”

 

그만한 능력이 있는 위치다. 그럴 권한도 가졌다. 저의 권세가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눈을 가로 막았다. 그에게 바울은 증거한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15-16).” 주 앞에 겸손은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아이가 긴장하고 쑥스러워하면서도 두 손을 모으고 축복기도를 사모하는 데서 그 차이를 알 것 같았다.

 

안다고 여기는 우리의 지식이 문제다. ‘혹시나’ 하는 어떤 바람이 우리를 흔든다. 이런저런 사연과 그럴 수 없는 여건과 환경이 우리를 옥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특징은 뚜렷하였다. 강권하심이다. 주권적인 은총이 있었다. 자발적이고 기꺼운 순종이란 본래부터 불가능하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와 같은 간절함이 어디서 나올까?

 

예수님도 고통으로 순종을 배우셨다고 하니,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우리에게 두시는 고난의 그 이유는 간단하시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처럼 만드시길 원하신다. 그러니까 본질상의 본질은 이미 하나님과 같은 그의 형상과 모양의 사람이었다. 누구는 답답한 심정을 이끌고 ‘하나님 만나러’ 휴양림으로 갔다.

 

저는 이직을 생각하고 좋지 않은 건강을 두고 생각이 많다. 그래서 도모하는 일이겠으니. 강권하심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시다.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5).” 기어이 꿇리신다. 고통이나 축복이었다. 돌이켜 내가 받은 은총이 그러하였다. 아이의 순진무구한 자세를 보며 그럴 수 없는 나름의 건강하다고 여기는 가족과 저의 형을 생각하였다. 무탈하고 아무 일 없는 게 결코 능사는 아니다. 우리 안에 어떤 권리 주장도 없어야 하는데, 그러기까지는 어쩔 수 없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2:12).” 그런 나를 주 앞에 두시려고, 본래의 그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시려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곧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6).”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사는 일이 되었다. 별개의 세상이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세계다. ‘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감각 없는 자신의 뜻을 따르며 살았는지 모른다.

 

사회 생활하다보면 술 한 잔쯤이야. 안 믿는 자들과 일을 도모하려니까 저들 상에 머리를 조아리는 일쯤이야. 돼지 콧구멍에 지폐도 꽂아두고, 술잔도 휘휘 돌려 천지신명의 도움도 바라면서. 사람 사는 일 뭐 있나? 다 그런 것이지! 하고 여겼던 그 한없이 가벼운 가벼움으로 겸사겸사 성경을 들고 휴양림으로 며칠 요양을 떠나듯 ‘하나님 만나러 간다.’는 말에 나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겸하여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성경은 그 구분을 분명히 하신다. 모호하지 않다. 그럴 수 있지, 하는 허용의 범주가 아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 10:21).” 나는 그래서 순순히 순종하는 아이의 조아림이 그 어떤 영성보다 귀하고 아름다웠다. 늘 보면 아이로 인해 내가 배우는 게 더 많다. 우리가 시험에 드는 까닭은 간단하다. 이방계집을 쫓듯 마음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하시는 말씀을 허투루 듣는 일이다.

 

그래놓고도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다. 누가 뭐라면 오히려 볼멘소리로 항변한다. 그게 뭐? 하는 자기주장이 엄연하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잠 6:27-28).” 그래놓고는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다른 만족을 추구하는 일도 말이다. 그렇듯 깨어있는 의무를 저버릴 때 영락없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아니라고 하면서도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선을 긋고 서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자꾸 망각하는 것이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계 3:2).” 어쩌면 부정하는 것인지도. 스스로의 당위성을 부여잡고 끝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하며 말씀보다 목소리를 높이는 일에 대하여.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남과 비교하며, 남과 어울리려 드는 한은 어림없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요 14:30-31).”

 

그러게. 나는 늘 한 아이로 인해 즐거워하고 씨름한다. 내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 해도 상관없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 앞에 나는 늘 숨이 막힌다. 수백 명 수천 명이 출석하는 교회와 저들의 열정과 열심을 나는 따라할 수도 없다. 다만 스치는 바람이었다 해도, 지금 내게 저 아이를 보내신 까닭은 서로를 통해 주의 사랑이 어찌 역사하시는가를 알게 하려 하심이다. 더하여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심이다. 모르겠다. 수천 명이 오가는 교회의 목회는 어떠한지. 다만 나는 아이의 어눌한 표정과 말투에서 주를 사모하는 데 경이로웠다. 감사가 저절로 나왔다. 재고 따지지 않는 아이의 다만 순수함이라니!

 

우린 저와 다른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그저 우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결국은 우리도 피로 사신 교회라.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누구도 와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중보하는 일.

 

우리들로 하여금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그래서 나는 아이의 순종이 그 어떤 잘남과 뛰어남과 훌륭함과 유별남보다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이 일을 한 성령이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아이는 서둘러 두 시 청년부 예배를 드리러가면서, ‘마음을 다해 예배할게요.’ 하는 문자를 주었다.

 

어느 게 더 나은지 모르겠다. 성경을 들고 휴양림으로 들어가며 기도를 부탁하는 누구와 아이의 저 단순한 문장 사이에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3:12).”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사는 것 같은 세상이 지나고 나면,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 앞에 나의 마음을 쓴다. 고백한다.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시 45:1).” 그리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기를 힘쓰나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145: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