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사도행전 26:8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편 47:6-7
부활이 없다면 주의 자녀가 된다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 단지 종교적인 신념이나 신앙의 위안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이로운 정도의 것이라면, 부활의 삶을 살라는 성경의 이치는 가치가 없어 보인다. 주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일이다. 믿는다는 일은 그의 일을 한다는 소리다. 신앙이란 빈손 들고 주 앞에 서는 일이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 10:9).”
곧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인데, 이것이 선이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12:3).” 앞서 참으신 이가 계시다. 우리는 여전히 싸운다. 내적으로는 내 안의 죄성으로 인함이고 외적으로는 안 믿는 이들의 눈총과 멸시에 대함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4-5).”
우리에게 더는 정죄함이 없다. 하나님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곧 우리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리 여겨주시는 의다.
사탄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한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우리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곧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다만 징계는 따른다. 정죄함이 없다고 해서 더는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 89:32).”이는 당연한 것으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자녀라면 이 또한 마땅한 경우다. 꾸짖고 야단치지 않는다면 저는 사생이거나 남이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5).”
왜냐하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6-7).”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특권이고 권세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가령 여름이 되면서 내겐 아주 고역이다. 다리가 저리고 시려 책상 아래 난로를 켜야 하고, 그러면 더운 열기로 선풍기도 돌린다. 하필 보조기가 또 말썽이라 불안하고 그것 때문에도 의기소침하여 속이 볶인다. 그러는 와중에 아이가 다녀가고, 마침 사장까지 건너와 이런저런 일들을 이야기한다. 내 코가 석 자라. 때론 만사가 귀찮고 나 하나 건사하는 일이 죽을 맛이다. 어떤 우울감이 목을 조이는 것 같다. 뭐라 말을 한들 서럽기만 하고, 늘 그러려니 하는 일이라 서로가 속상할 따름이다. 이는 실질적인 고통이다.
그런데 이를 ‘육체의 가시’로 표현한 바울의 이해를 생각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그 의미가 새롭다. 나는 그래서 늙는다는 일이 다행이다. 젊어지려 하지 않는다. 누굴 의식하고 어떤 일을 도모하는 데 더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채찍, 꾸지람, 징계, 가시와 같은 표현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한다. 왜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나 하면 나는 <위대한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곧 하나님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리 두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그것으로 나는 주의 이름을 더욱 의지할 뿐이다.
사장은 건너와 이런저런 계획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일을 염두에 두어 ‘알아두시라’ 하고 있었다. 옆 사무실을 접기로 했고 누가 들어올 것 같으며 가을쯤 해서 어떻게 또 판이 짜일 것 같은데 그럼 우리가 어디로 옮길 수도 있고, 어쩌고. 이어지는 저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야말로 모르지. 나는 그 일이 내 일이 아닌듯하여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었다. 교회를 하는데 있어 두시든, 옮기시든, 새로 하시든 모두가 주의 일이다. 전에처럼 내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일이 아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와 같은 개념이다. 내 몸에 대하여서도 고통 중이면 고통 때문에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고 기쁜 일이면 기쁨 때문에 주를 찬송하는 일이다. 교회가 주의 것이듯 내가 또한 주의 것이다. 그리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일을 신뢰함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8:29).” 마치 나는 나에 대해 초월한 사람처럼 말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다. 늘 조바심내고 심드렁하고 짜증부리고 내 안에 이는 어떤 불만으로 가득하다. 시무룩하고 또는 서럽고 고통스러워 한탄이 저절로 인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러면서도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고, 그러다 본문을 여러 번 읽었으며 그 ‘위대한 상속자’ 또는 ‘위대한 유산’에 대하여 메모를 하고 성경을 인용하여 찾아보면서 오후를 보냈다. 그러니까 심드렁해서 주의 뜻을 살핀다. 심심해서 설교 원고를 조금씩 작성하고, 내려가 노트를 새로 사다 글씨를 쓴다. 자음과 모음을 한데 모아 성구를 적어 옮기다보면 내 안의 짜증이 나를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서러움이나 서글픔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한다. 고통이 고통스러워서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며 주를 바란다.
나는 종종 이런 내가 엉터리 같다. 어쩔 수 없어서 주를 사랑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럼 다 바꿔서 좋고 좋기만 하다면 과연 내가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할 수 있을까? 내게 고난이 없다면 주를 바라는 마음이 지금처럼 절절할 수 있을까? 오후께 아이가 지나는 길에 들러 잠깐이라도 뭐라 말을 나눠주다 가는 일, 어떻게 이를 마치 선물처럼 여기며 감사할 수 있겠나? 저 아이가 교회로 주의 자녀로 나올 수만 있다면 하고 바라는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내 안에 이는 게 내 의지와는 별개의 것이다.
오늘 바울의 증언은 그런 소리가 아닐까?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 26:8).” 주의 부활이 그렇다고 믿어지는데, 그러므로 나 역시 주의 부활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는데, 이를 어찌 내가 주도하여 그리 작심하여서 될 일이기나 하겠나?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시 47:6-7).” 내게 두신 마음이라. 징계란 더욱 주를 사랑하게 한다. 신기하게도 고난이란 더욱 큰 주의 은혜를 사모하게 한다.
이를 성경은 순종의 훈련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곧 우리 주님도 고난으로 인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하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 나는 이 말씀 앞에 모든 걸 건다. ‘후에’ 나의 이런저런 고통으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는 자’로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을 말이다. 늘 싸워대는 내 안의 내가 있어서 이와 같은 말씀도 귀에 들어온다.
이를 감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여겨도 된다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러고 앉아 말씀을 뒤적거리고,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누가 오면 이런저런 말을 들어주고 혹은 저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어서.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이를 실질적으로 느끼며 사는 삶으로의 특권이라니! 한 날의 수고가 그날로 족한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이 하게 하면 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하루하루 산다는 말, 더한 사람의 경우도 있을 텐데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그저 단순하게는 이 몸 하나 건사하며 사는 일이 곧 사역이라. 주가 주신 것이다. 맡기신 일이다. 감당해야 하는 참여이고 영광이다. 지루하고 지겨워서 주 앞에 앉는다. 다른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않아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내 의지나 노력으로는 감당이 안 돼 주께 맡긴다. 날마다 매순간이 실전이다.
이를 설교 원고로 작성하다 문득 주시는 대목이 변화산에서 황홀해하는 제자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오시는 주님이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어지러운 세상 중에 독야청청 유아독존 감사가 절로 나올 일이다. 한데 주님은 저를 이끌고 산을 내려오셨는데, 하필이면 마주하는 게 귀신들린 아들이다(14-21). 불에도 물에도 넘어지는 애라 누구도 감당이 안 된다.
감당이 안 되는 일을 우리 앞에 두시는 게 사랑이다. 바울은 자신의 경우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내가 애써 수고하는 게, 가시채로 뒷발질하기가 고생일 따름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게 늘어나면서 비로소 주님이 절실하다. 점점 늙어간다는 게 좋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기를 쓰고 가시채를 뒷발질하기를 더는 어려워질 테니까.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 47:1).” 곧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4-5).” 그러므로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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