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전봉석 2018. 6. 15. 06:57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사도행전 21:3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

 

 

 

숨이 가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부동맥 때문인지, 협심증을 의심해봐야 하는 것인지, 그 증상을 살펴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답이 수십 개였다. 작년에 심전도 검사도 해보고 피검사도 해보았으나 별다른 이상이 없어 다들 ‘심리적인 요인’으로 돌렸다. 안정제를 먹고 나면 조금 뒤 좀 나아지기도 하여서, 어제는 한 달 치의 약을 탈 겸 오전에 일찍 정신과로 갔다. 하필 담당 주치의가 없어 다른 이가 진료를 보았다. 이것저것 묻는 말에 소상히 대답하였다. 내가 목사인 것을 알고 저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술을 좀 드셔보시죠!

 

너무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억압이 어떤 불안의 원인이 아닐까? 해서 한 소리다. 뭐라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 같아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 저는 왜 이런 사람을 이렇듯 방치하는가, 하는 표정으로 다른 약을 열심히 권했으나 나는 평소대로 달라고 주문하였다. 돌아와 신대원 동기 전도사와 통화를 했다. 저는 현재 주어진 상황을 어려워하며 이게 자신에게 맞는 일인지 고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땅에 살면서 돌아갈 본향을 바라고 사는 사람으로는 당연한 씨름이었다. 죽을 때까지 우린 부대끼고 힘에 겨워 이 길이 맞나?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게 맞나? 하는 고심에 빠지곤 할 것이다. 정신과 의사의 어처구니없는 권유로 마음이 조금 상했다가 나는 동기 전도사에게 권면하다 확실히 그 답을 얻었다. 처한 우리의 모든 환경이 주의 뜻이다. 어떤 어려움도 또는 훼방도 그에 따른 주의 의도가 있다. 그의 섭리를 알고 모르고를 떠나 우리는 다만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누리는 삶이다. 순종이 거기에서 나온다.

 

안정제를 먹으면서도 ‘이 일’을 하는 것이다. 분명히 잡혀가 고초를 당할 것을 알면서도 이내 마다하지 않는 오늘 말씀의 전황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못하겠다, 이 길이 맞나? 싶으면서도 주신 바 그 삶을 다하는 게 사명이다. 사역이란 그런 것이다. 뜻하지 않게 우연히, 어쩌면 잘못된 실수로 우리를 여기에 두시는 분이 아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 21:31).”

 

염려하여 우는 이들을 향한 바울의 말은 우리의 자세가 된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을 각오도 하였다.’ 대체 이런 애를 뭐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으면서도 그리 내 앞에 보내신 이가 주님인 것을 알 때, 왜 나의 육신은 이 모양이어서 괴롭기가 한이 없나 싶을 때도, 형편은 어렵고 앞날은 깜깜한데 계속 이 길을 가야 하는 게 맞나? 하는 회의와 갈등이 목을 조이는 것 같아도. 첫째,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을 모르실 리 없다. 그렇다면 둘째, 그럼에도 이 일을 감당하기를 바라신다는 확신.

 

재주도 없고, 실력도 없고, 이미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한 우려에도,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어제 아침의 말씀이 결연히 들려오는 것이다. 우리 안에 두시는 알 수 없는 기쁨이 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나는 동기에게 그와 같은 설명을 하는 동안 벌써 내 안에 일던 우울감이나 어떤 서글픔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공연히 안 믿는 의사에게 ‘목사’가 우습게 된 게 아닌가 하여, 저의 그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 일에 만족하시잖아요? 그렇다면 불안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너무 바르게 살려는 억압이 아닐까요? 예전처럼 술을 한 잔 해보시죠. 소위 안 믿는 친구들과 다시 어울려보시죠. 그럼 안 되는 건가요? 하고 묻는, 당최 저런 자와 이야기를 더 길게 하는 데서 무슨 선한 것이 있겠나싶었다.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역경이 없는가. 오늘 바울은 저를 위해 염려하며 우는 이들을 보고 말한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그 정도의 만족이고 신앙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없어야 하지 않겠나? 나는 그래서 얻는 가난이나 어떤 육신의 질병도 박해로 이해한다. 아무도 안 만나고, 특히 ‘어떤 문제’를 안고 오는 이가 없다면 훨씬 홀가분하게 잘 살 것 같다.

 

실제 평범한 나의 일상 중에는 굳이 안정제를 먹지 않아도 될 정도의 평온이 있기도 하다. 약 먹는 걸 까먹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한데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어디 시골에 내려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조용한 시골교회 목사나 하면서 예배당 앞마당에 잡초나 뽑고 정원을 가꾸면서 속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 이 막연하고 낭만적인 꿈꿀 권리가 누구에게는 없겠나?

 

그런데 말씀은 그런 것이 부질없음을, 되레 부활을 붙드는 삶을 요구하신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를 알기 때문에 마다하지 않는 길이다. 놓치기 싫은 것이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그렇다고 내가 그럼 또 그만큼 애쓰고 수고하며 누구보다 이를 열심히 잘하고 있나?

 

너무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게 불안의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의사의 말에 헛웃음만 나오던 건 그 때문이다. 목사라는 중압감을 저는 그리 이해하고 있었나보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내겐 또 그것도 아니다. 속된 말로 ‘고작 이 일을’ 행하는 데 있어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라 차마 그의 넘겨짚은 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모르지. 어디 큰 교회 대단한 지위의 자리에서라면 또 그렇다고 할 수 있을지도.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하는 삶이다.’ 마다하지 않는 구속이다. 억압이다. 그래서 그런 거라면 기꺼운 일이다. 죽을 각오도 했다는 바울의 결연함이 괜한 게 아니었다.

 

이에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 21:14).”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이는 우리의 유일한 통로가 아닌가? 그래서 잠시 목회를 쉰다고 해서 삶이 좀 나아지려는가? 맡기신 사역을 되돌려 다른 일을 모색한다고 해서 조금은 수월해지겠나? 아이들을 대하고 아이엄마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 너무 힘에 부치고 어렵다고 하는 동기에게 마치 나는 나에게 들려주듯이 말해주었다. 과연 다른 길을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겠나?

 

믿음의 사람들이란 괜히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저야말로 불안장애가 없었겠나? 공황을 겪지 않았겠나? 그와 같은 의학명이 정립되기 전이어서 그렇지 저 또한 필요하다면 신경안정제를 먹으면서도 이 길을 갔을 것이다. 심지어는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도대체 어떻게 살라고 하는 소린가. 그래서 우린 더욱 주의 은혜를 구하는 자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여건이 축복이었다. 그것으로 은총을 구한다. 애통하는 자로 산다. 온유할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하여 주밖에 다른 것으로 채울 수가 없다. 내가 왜 저 아이를 긍휼히 여기는지, 이게 긍휼함이 맞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여 한 번 더 기도하는 것이다. 최소한 저 아이는 주의 이름을 부를 줄 모르니까, 저를 위해서. 저의 부모는 주의 마음을 알지도 못할 테니까 우리가 주의 마음으로, 그럴 수만 있다면 안정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약이라도 먹으면서 또 마주대해야 하는 일이 아니겠나?

 

말 그대로 이 일이 내 일이 아니라면 바꾸셔도 주가 바꾸실 것이다. 나의 처한 환경을 바꾸시든 아니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나의 체질을 바꾸시든. 돌아오는 주일부터 저들 부부가 ‘단독 목회’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뒤의 어려움이라 그 의미가 짐작이 되었다. 사탄은 참 훌륭한 것 같다. 그리 또 훼방을 놓으며, 이런데도 할 수 있겠어? 하고 다그치는 것이다. 공연한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한다. 실제 바울은 강심장이라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저도 울었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저도 속상했다.

 

그래서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어쩌겠어? 이 길을 가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고, 이 일을 맡기시는 게 분명 하나님이실 텐데, 그럼 뭐? 그래서 뭐? 머리 아프면 두통약도 먹고 나처럼 불안이 엄습하면 안정제도 먹으면서, 가야지! 안 가면 또 다른 뾰족한 수가 있나? 다른 길을 가고 다른 일을 한다고 나아지겠나? 예전처럼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면서 안 믿는 친구들과 어울려보시면 어때요? 하는 의사의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차마 나는 말하지 못했다. 다시 그러고 사느니 죽는 게 낫다.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는 바울의 결연함은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더욱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우리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남이다. 나는 다시 저의 기도를 읊조린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결코 나의 가시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 가시로 주의 능력을 바랄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 내가 내게 전하여 주는 말씀이 된다. 낙심하지 마라. 불안해하지 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한다.’ 곧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8).” 밝을 땐 찬송하고 밤이면 기도한다. 좋을 땐 찬양하고 힘들 땐 기도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