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4:4-8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53:2-3
늘 나는 나에게 걸려 넘어진다. 가만히 들어오는 일곱 형제가 있었으니 의기소침과 시무룩함과 공연한 침묵과 자격지심과 남을 향한 서러움과 속상함과 어처구니없는 원망이었다. 괜히 불안하여 아이가 오기 전에 화장실을 몇 번 더 들락거렸고, 안정제를 하나 더 먹었다. 안타까움은 난데없는 속상함으로 나를 휘어잡는가 싶더니 더 있다가 가게하고 싶은 마음과 내 몸이 볶여 서러운 마음이 싸웠다. 내일도 오고, 매일 와도 돼! 하고 말을 하면서도 그게 과연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없어 괴로웠다.
여느 때보다 반응이 좀 느리고 혼자 시선을 두는 지점이 멀어서 나는 아이를 보며 애를 태웠다. 가령 오후께 중3 아이는 더워서 그랬겠지만, 시험 때라 가방이 무거워 그렇겠지만 짜증이 잔뜩 붙은 얼굴로, 뭐라 말을 걸기가 무섭게 성가셔하는 것이다. 마치 날 위해 글을 써주는 것처럼 또는 내 것을 대신해주는 일인 것처럼 투덜거리니까 화가 났다. 그럴 때 나는 일부러 말을 않는다. 그러다 또 안쓰러워 뭐라 말을 걸고 얼레고 달려다 힘에 겹다.
아침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초딩 5학년 아이 둘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는 서로 서먹하여 그렇겠지만 모르는 척 시선을 다른 데 두고 스쳐 지나가는데 어떤 서러움인지 원망인지, 알 수 없는 화가 일었다. ‘내가 자기들에게 어떻게 잘해주었는데!’ 하는 서운함인 것이다. 그렇게 오전부터 볶이더니 하루 종일 마음이 언짢았다. 속상한 것 같기도 하고 그것으로 괜히 의기소침해져서 ‘내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어떤 자기 비하에 이르기까지. 이래저래 몸은 볶이고 마음은 어려운 하루였다.
그런 내게 이와 같은 말씀은 한없이 송구하고 민망하게 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내 안에 이는 일곱 형제의 마음이 공연한 게 아니었다. 나름 애쓰고, 한다고 했던 데 따른 기대와 어떤 처우와 그만한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내게 두시는 이 모든 것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어떤 대가로 여겨지는 이상 늘 모자라고 서운한 것이다. 바라는 마음으로 그 몫을 더하려고 하는 것이다. 돌아보면 하는 게 없다고 하면서도 나름 내가 이만큼 했는데, 싶은 어떤 내 몫의 값을 바라는 마음에서 원망이 앞서는 일이다.
어쩜 이렇게 뻔뻔한지 모르겠다. 나는 저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 내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갚지 못하는 이에게 화를 내고 내 몫을 요구하는 격이다(마 18:23-35).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데서 늘 걸려 넘어지는 게 누구 때문이 아니라 번번이 나 때문이다. 누구에게 일일이 말로 할 수 없는 마음이라 나는 주님 앞에 송구하기만 하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내 안에 이는 일곱 가지 마음이 실은 그 때문인가? 그래서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자꾸 서운하고 서러운가.
아이가 돌아가고, 좀 더 있으라고 할 걸. 잘해줄 걸. 친절히 대할 걸. 너그러웠어야 하는데. 숱한 후회가 또 한심함이 나를 옥죄는 것이다. 곧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나의 믿음이 너무 뻔뻔한 것 같아서 면목이 없다. 고개를 들 수 없이 송구하다.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나는 항상 계면쩍은 것이다. 주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나의 마음은 어쩌면 이렇게 옹졸하고 누추하기만 한지 모르겠다.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나만한 사람이 어디 또 있겠나?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오늘 아침의 말씀은 나를 더욱 민망하고 죄송하게 한다. 그럼 좀 나아지고 어디쯤 성장하여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늘 그 자리여서, 여전히 또 똑같아서 도대체 나는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면목이 없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그런 나를 여기에 두시고, 그런 나에게 저 아이들을 붙이시고, 그런 나로 하여금 주의 사랑을 채워가게 하시니 이야말로 주의 마음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나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시려고 그런다.’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낫다는 다윗의 고백이 그런 것이었구나. 죽이시더라도 주는 선하시다고 말한 욥의 신앙이었다. 도와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이었다.
이 모두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다. 어찌 감히 또 바랄 수 없이 뻔뻔하기만 한데 또 바랄 수밖에 없는 나의 연약함이었다. 믿기지 않아서 바랄 수도 없는 일인데도 주께 바라는 한 가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살게 하시려고 주께서 나를 또 내게 맡기신 것이구나! 이 몸뚱이도 이 마음도 결국은 내가 다스리고 경작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그 땅의 흙으로 지음 바 된 나에 대하여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분명하였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26).”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기본 전제는 내게 두신 믿음이었다. 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믿음이 있어야 믿는 일이다. 곧 이것이 진리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위로가 되는 건 또 너무 뻔뻔한 것일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2-3).” 어쩜 이렇게 안 변할까? 언제쯤이나 돼야 나는 좀 의연하여져서 조금은 너그럽고 조금은 인자해질 수 있을까? 나의 옹졸한 마음이야말로 구제불능인 것만 같다. 늘 걸려 넘어지고 보면 내 발에 걸렸다. 내 마음에 걸렸다. 내 생각에 걸렸다. 누구 때문이야! 하고 한참을 원망하다보면 그게 아니라 그게 다 나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그러기까지 나를 사랑하사 오늘에 두신 것인데, 나는 점점 누추하고 옹색하기만 하니 견딜 수가 없다. 공연히 아내에게 투덜거리고, 딸애에게 뭐라 짜증을 부리고 나서야 한없이 못난 나 때문인 것을 아는 일이니까. 왜 기어이 엎지르고 난 뒤에야 후회를 하는 것일까? 꼭 그렇듯 자빠져봐야 아는 일일까? 그런 내게 말씀은 다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스스로 온전하여질 수 없음을 날마다 재확인하는 것이다. 주의 은혜가 아니고는 살 수가 없음을.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그럴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나를 이끄신다. 부끄러움과 어떤 면구함으로 고개를 들 수 없으나,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그렇지 않으면 어찌해볼 수조차 없다. 가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그렇구나. 전에는 그게 그렇게 부당하게 여겨지고 어떤 조건처럼 여겨져 어렵기만 하였는데, 주의 계명이 나 자신보다 쉬운 일이다. 그의 계명이 나보다 무거운 게 아니었다. 나는 나를 들 수 없다. 책임질 수도 없고 어떻게 감당할 수도 없다. 내가 이해하는 게 맞는다면, 하나님의 계명은 그렇게 무거운 게 아니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내게 두시는 은혜가 나를 돌이켜 자유하게 하심이다.
교통법규와 같이 안 지킬 땐 그것보다 성가신 게 없는데 지키려고 하면 그것보다 안전한 게 없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였구나!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6-17).” 이는 무엇을 무찌르고 누굴 이겨내는 역할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를 이겨내는 수단이 된다. 나를 지키는 것이다. 내가 나가 사탄을 대적하고 적을 무찌르고 악한 영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그래서 감사가 보약이었다. 왜 저들이 그 열악한 가운데서도 주께 감사하고 감사할 수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감사가 그 어떤 무기보다 귀한 무기였다. 내가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해야 하는데, 그 뿌리가 말씀에 내려져야 하고 그 굳건한 믿음의 열매가 감사로 피어나는 것이었다.
날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기 일쑤인 것을, 그래. 그래서 말씀뿐이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그렇게 오직 성경으로 성경 안에서 예수를 바라보기.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 말씀에 뿌리내리지 않는 신앙은 휘청거리며 고달프기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기도도 좋고 찬송도 귀하나, 말씀 붙들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일처럼 그 믿음으로 또한 은혜도 누리는 것이었다.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3).” 그런 정도의 사람이지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그럴 수 있는 능력과 힘도 말씀에서 난다. 다시 또 나를 건사하는 일에서부터 아이를 마주하고 주의 마음으로 대하는 일에까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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