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전봉석 2018. 6. 23. 07:2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23

 

 

 

감히 말하건대 하나님은 어렵지 않다. 가만 보면 믿음보다 쉬운 게 없다. 아등바등 사느라 여념이 없는 세상에서 저들의 삶을 보다 나를 돌아보면 더욱 그러하다. 아이로 인해 힘들어서 얘 때문에 내가 왜 힘든가했더니, 그건 내 맘대로 안 되니까 그렇다. 주의 이름으로 대한다고 하면서 내 임의로 대하려니까 말이다. 주의 마음으로가 아니라 나의 마음으로 하려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이 언짢아지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이를 새삼 깨달은 사람처럼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주가 하시는구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합의사항이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내가 사는 것은 내가 겸손하고 정직하여, 바르고 온전하여 그 대가로 이뤄지는 복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 앞에 나는 주저 없이 감복한다. 때론 망상과 같다. 헛된 자기 위안으로도 느껴진다. 공상의 나래가 짙은 것도 같다. 그런데 이 같은 복음의 진리를 과연 맨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이는 오전에 일찍 병원에 들러야 해서 성경공부를 오지 못했다. 조현병으로 병명이 바뀌었으나 약을 바꾸어서 많이 호전되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게 어디 약 때문이겠나? 아이의 선하고 어진 마음이 주를 바랄 때 보면, 환자여서 그렇거나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그렇거나 둘 중 하나다. 아이에 대해 저들은 ‘아픈 아이’로 단정하여 그리 몰곤 하는데, 나는 여느 어떤 신앙 좋고 덕망 있는 위인들 보다 한결 낫다고 여겨진다. 위선적으로 가면을 쓰고 사는 신앙인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가운데 아이의 ‘병적인 모습’이 나는 더욱 선하게 여겨진다.

 

주님이 하실 것이다. 요즘 자꾸 기도하게 하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를 낫게 해달라고 빌지는 않는다. 나아서 주를 모른다, 하고 사느니 주의 도우심을 절실히 바라고 살아야 하는 삶이 훨씬 복되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비유에서 나는 늘 배움이 크다. 호의호식하며 떵떵거리고 사느라 하나님 없이 사느니, 그의 문에서 비루하게 천히 살면서 주의 도우심으로만 살 수 있는 ‘나사로’의 삶이 훨씬 복되다. 나이가 이쯤 되어서 그런가, 인생 금방이다. 별 거 없다. 아름답고 좋은 것도 허사다. 그렇게 십년 이십년 마음껏 누리며 살았다 한들, 그 끝이 너무 빤한 것을.

 

우리 옆 사무실에 새로 누가 들어온다. 사장은 건너와 이를 알려주었다. 저쪽 큰 자리도 슬슬 정리하여서 세를 놓을 모양이다. 무슨 마사지 업종이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나는 기도의 제목이 교회를 이루어가는 데 훼방이 되는 것은 막아 주십사, 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여의치 않으면 우리가 나갈 생각도 한다. 이 일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시는구나! 어떤 변화를 모색하려는가. 나는 주의 생각을 다 알 수 없으나 반드시 그는 가장 선하신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건물이 온통 타락의 온상이라. 세상 다 그렇지, 싶다가도 다닥다닥 붙어있는 민망한 포즈의 광고지들을 볼 때면 우리를 왜 변화산 아래로 이끌어 내리셨는가를 알 것 같다. 어쨌든 저들 속에 두신다. 아니, 더 황당한 상황 앞에 놓이게 하신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마 17:15).” 왜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일까?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6).” 그 좋은 변화산에 그대로 머물며 초막 셋을 지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살고 싶은데, 기어이 미친 세상으로 끌어내리는 덴 다 이유가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우리는 저들로 변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그들로 핑계할 수 없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의 삶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알려주어야 한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니 사장은 풋, 웃음을 지었다.

 

교회로 위치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면 언제든 떠날 생각이다. 저는 나더러 좀 더 오래 있으라는 의미에서 매달 관리비 10여만 원도 제하여 주고 있다. 그 마음이 가상하여 주께서 저가 좋아하는 사업이 잘 되게 하신다. 나는 저의 부친의 남은 생에 주를 영접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고, 저는 어떻게 하면 사업이 더욱 번창할까를 구상한다. 동상이몽이라. 같은 세상을 살면서 서로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일에 대하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설교 원고를 다듬고 정리하느라 하루가 다 갔다. 오겠다던 중3 아이는 또 ‘무슨 일’이 생겨 오지 않았다.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며 탈고를 했다. 저녁에 아내와 딸애가 올라와 같이 기도제목을 나누고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이들에 대하여는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성경은 이를 분명히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그 이어지는 마음이 곧 더러움의 증거다.

 

불의가 무언가? 하나님의 의를 반대하는 일이다. 추악은 죄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탐욕은 더 많은 소유를 바란다. 악의는 내면의 악과 외면의 악으로 가득한 상태다. 내면의 악이라 하면, 그 안에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이 있다(엡 4:31). 그러므로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 3:8).” 외면적인 악이라 하면 악을 쌓는 삶이다(마 12:35). 겉치레와 치장에 능란하고 위선과 거짓에 능숙하다.

 

이에 시기와 살인의 바탕이 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1-2).” 분쟁은 남을 굴복시키는 일이고(롬 16:17-18), 사기는 기어이 속여서 빼앗는 일이다(수 7:11). 악독은 의도적인 악행이다(롬 3:13-14). 수군수군함은 온통 요즘 유행하는 토크쇼와 같이 험담하는 일이다(요 6:41-43). 비방은 속여서 남의 말을 하는 일이고(약 4:11), 능욕은 교만과 잔인함이다(막 10:33-34).

 

교만은 자기를 위한 주장과 변명이며(잠 16:18-19), 자랑하는 일은 헛된 목적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창 4:23-24). 악을 도모하는 일은 남을 끌어들이는 것이고(창 11:3-4), 부모를 거역하는 일은 본분을 다하지 못함이다(출 20:12). 우매한 자는 걱정이 많은 자이고(전 5:3), 배약하는 자는 신뢰할 수 없는 인종이다. 저는 자신도 못 믿는다. 무정하고 무자비한 자는 악에 노출된 지 오래여서 그 무뎌진 영혼이 썩은 지 오래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그러는 자신을 그들도 문제가 있다고 여기면서도 그런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으로 생겨나는 온갖 추하고 더러움에 대하여는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리 살아본 사람으로서 나는 그러는 저들을 옳다고 여겼고 나 또한 그러고 사는 일을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자유란 점점 더 죄에 물드는 것뿐이다.

 

아이의 그런저런 면을 걱정이나 하며 뭐라 하는 이들에게 나는 나보다 낫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였다. 누구 눈에는 나보다 더 망상에 사로잡힌 이가 또 있을까? 말끝마다 하나님을 찾는 것에 대하여 저들이 말쟁이라 욕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그래, 우리는 미쳤다. 미치지 않고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게 신앙이다. 믿음이란 그런 정의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니!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니! 아브라함이 그 예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4:18).”

 

이런저런 일련의 일들이 얽히고설켜 상황을 더 복잡하게 꼬이는 것 같지만 그럴 거 없다. 단순명료하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그러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게 복음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오늘 말씀은 이게 정답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