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전봉석 2018. 6. 24. 07:20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로마서 2:1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편 51:7

 

 

 

프란시스 쉐퍼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알지 못했던 이가 죽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저가 평생 남에 대해 지적질 했던 말로 판단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저의 목에 녹음기를 하나 두셨는데, 그건 남을 판단하는 소리가 모두 녹음이 된 것이다. 성경도 모른다 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했다고 하나 그의 안에 두신, ‘하나님을 알만 것’ 곧 저의 판단이 저를 정죄할 것이라는 것이다.

 

설교 원고를 다시 다듬으며 우리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데 안도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것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 그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사탄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우리의 죄 값이 되어주신 이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은 우리를 정죄한다.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 더, 우리가 정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남을 판단할 때 그 판단이 곧 우리 자신을 정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이 우리를 안이하게 할 수 있다. 이를 마치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쯤으로 생각하여, 그에 따른 마땅한 권리로써 구원을 생각하는 경우에는 말이다. 그래서 어느 이단은 한 번 구원 받았으면 회개할 게 없다는 둥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둥 하는 헛소리도 하는가보다.

 

신기할 정도로 요즘 로마서 말씀에 같이 몰렸다. 설교 원고의 주된 본문도 그렇고, 가정예배로 같이 읽는 곳도 그렇고, 이렇게 아침에 묵상하는 성경의 순서도 그렇고! 새삼 나는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지를 다각도로 묵상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토요일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기껏 엄청난 공사비를 들여 사업장을 꾸몄다가 채 일 년도 다하지 못하고 포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가, ‘목사님 제가 아주 속상해요.’ 하며 그 속내를 내비쳤다.

 

평생을 목회하는 남편을 뒷바라지 하고 아들 하나 사위 하나 모두 목사로 주 앞에 세우면서, 자신이 벌어 그 형편을 책임지던 이였다. 저번에 넌지시 말하길 ‘내가 다 했다. 늙어서 경제적인 구실을 못하는 남편이 밉다.’ 하는 소릴 들었을 때, 아찔했던 기억이 났다. 곁에 있던 안 믿는 저의 형부가 ‘그러게!’ 하면서 책임을 운운하고 가장이 어떠네, 하며 맞장구를 치듯 목회를 하는 동서와 젊은 목회자 조카와 조카사위를 흉보는 것이다. 나야말로 언제부턴가 돈벌이에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터라 민망하기까지 한 소리들이었다.

 

아뿔싸. 그리고는 채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그 엄청난 돈을 들인 사업장을 접게 된 것이다. 저의 판단이 고스란히 자신을 심판하는 게 되었다. 평생을 어쨌든 사모로서 생활했던 이가 할 소리는 아닌데, 싶더니만. 하긴 좋은 재능으로 젊을 땐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후조리원을 세 군데나 운영하면서 그에 따른 종사자만 수십 명을 건사하며 돈을 벌었다고 하니, 그게 또한 자신의 자부심이기도 하긴 하였겠다. 자신이 남편 신학 시키고 교회 살림 뒷바라지 하고, 이제 아들에 사위까지 매월 지원하는 돈이 거기서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속상하다는 푸념에 내가 뭐라 할 말이 있나. 힘내시라. 주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엄청난 규모의 냉장고 두 개와 세탁기를 업자에게 넘기기 전에 혹시 내게 필요하지 않냐 묻는데 나는 좀생이라 그리 좋고 큰 건 되레 부담이 되어 됐다고 했다. 다 부질없다. ‘삼 김 시대’를 풍미했던 어떤 이가 9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 잘난 삶은 늘 이 땅의 2인자로 꼽히며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누렸던 이였다. 그러니 저의 노년에 풍이 들어 휠체어 신세로 말을 뱉어내곤 했으니, 사람 팔자 다 거기서 거기다.

 

노년의 사모가 속상해하는 그 마음이 왠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나의 고약한 심보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일갈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두려운 일이다. 우린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남을 운운하곤 하는지. 나도 마찬가지이면서 남을 험담한다. 나도 다를 게 없으면서 욕한다. 아,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아이 문제로 아이엄마랑 길게 통화를 하였다. 약이 어떻게 더 늘었고, 아이 상태가 어떻게 더 나빠졌는지, 그런 아이를 세상이 어떻게 대하는지, 그게 속상해서 아이를 닦달하다보면 그런 자신이 또 얼마나 고약하게 여겨지는지. 이이도 말이 고픈 사람이라. 그 우울증의 깊이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쏟아져 나오는 말에 나는 공책에 뭐라 메모를 하며 내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게 뭔지를 적어두었다. 조현이나 조울로 장애판정을 받으면 아무래도 복지관을 끼고 취업을 하는 데 어려울 것 같아, 지적장애로 판정을 받았으면 하는 것인데. 엄마로서 아이의 현실과 앞날을 염려하여 하는 말들이라 그 하나하나가 속에 아렸다.

 

월수금은 그래도 오전에 글방에 와서 다행인데 화목토는 오전에 아이가 혼자 있어 속상한 거라. 오늘 뭐해? 오늘 뭐하지? 하는 아이 말에 엄마는 속이 터지는 것이다. 스물둘, 다 큰 자식을 본인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인데, 나는 그저 힘내시라. 주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 저에게는 당장 하나마나한 소리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이 나를 불러세우시는 것 같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 2:21).”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마음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외면하는지. 남에게 그리 말하고는 내가 스스로 그 말을 도둑질하듯 꿀꺽 삼키고 마는지. 어찌 됐든 아이를 매일 오게 하고, 공부나 글쓰기를 좀 시켜보면 어떨까? 어디든 다니고, 다니면서 아이가 배워서 주 앞에서 온전하여질 수 있다면!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그 마음도 주가 주도하시리라 믿는다. 행여 너무 앞서다 내가 지쳐 쓰러질까봐 주저하는 것인데.

 

모르겠다. 나는 아무 결정도 하지 않는다. 주님께 미룬다. 이 아이를 보내시는 이가 또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실 것임을 안다. 한 아이로 벅찬 나의 초라한 구실도 다 아시는 이시다. 우리 중3 아이도 어제 새벽에 글을 하나 써서 올렸다. 처음엔 그런 내용이 자신의 불행을 자꾸 들추는 것 같다며 볼멘소리를 하더니, 직면하고 보면 새삼 그럴 것도 없다. 숨기고 감추어서 될 게 아니다. 아이의 그런저런 사정도 행여 누가 알까봐 쉬쉬할 문제가 아니다. 중3 아이가 바뀌어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어 이를 객관화시키는 노력이 가상하였다.

 

그렇듯 우리에게 두시는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게 없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쉬쉬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도 없다. 그리 두시는 이가 민망하실 일이다. 다 뜻이 있고 계획이 있으셔서 그리 행하심인데, 이를 믿는다는 사람이 숨기고 감추고 들려니까 그 속이 오죽하겠나? 오늘 다윗은 그러한 자신의 허물조차 승화시켜 주 앞에서 찬송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우리의 어떤 성과가 아니다. 나름 이룩한 어떤 결과를 보자시는 게 아니다. 우리의 상한 심령이라.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우리의 애통함이다. 주의 위로는 거기에 있었다. 나의 나 된 게 은혜라. 때론 힘에 겨워도 그것으로 부모 형제 속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해도, 또한 그것으로 우리는 더욱 주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1).”

 

저는 저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여 그 담대함으로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2).” 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3).” 그러므로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6).” 우리는 또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지만 그것으로 주의 도우심을 더욱 간절하게 바란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