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전봉석 2018. 7. 5. 06:58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4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시편 62:9

 

 

말을 하다가 하고자 했던 말을 잃어서 답답해하는 아이가 안쓰럽다. 성경 어디를 금방 읽고는 어디였는지 몰라 다시 되묻는 아이 때문에 속상하다. 그럼에도 주의 영광을 바라고 함께 아멘, 하는 아이의 심성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안다. 내 영혼이 저를 즐거워한다. 오전에 같이 썼던 성경구절이 어디인지 몰라 엉뚱한 곳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글씨로 써보는 아이의 수고가 갸륵하다. 아이가 웃어주면 덩달아 마음이 환해진다.

 

이를 영적예배라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온 몸과 온 마음을 드렸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 왜 예수님은 창기와 세리와 천한 신분의 제자들과 함께 계셨는지 알 것 같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나는 온전하지 못한 아이의 글씨를 본다. 성경공부를 하고 돌아가 오후에 쓴 여러 장의 성경구절을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그럴 때마다 칭찬을 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고개를 숙여 한 글자 한 글자 되새김하여 읽었을 아이의 떨리는 손끝을 생각하였다. 이는 제 일 계명이 실현됨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30).” 아이가 뭘 안다고 그럴까? 우리 안에 드는 회의가 악하다. 하나님을 이로써 우리를 부끄럽게 하신다. 주의 긍휼하심 앞에서는 우리의 결핍이면 족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우리는 그 출처부터가 다른 것이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그래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은데,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0-31).”

 

주가 이루어내신다. 중3 아이가 시험을 잘 봤다며 기뻐서 전화를 했다. 남들이 들으면 우스울 수밖에 없는 점수지만 우리에겐 백점을 받은 일보다 귀하다. 늘 꼴찌에 어쩌다 한두 개 맞추면 다였던 아이가 스스로 공부를 해서 30점을 맞고 40점이 되어 기뻐하는 것이다. 종종 분을 삭이지 못해 분노를 표출하던 5학년 아이가 이제 조금씩 참을 줄도 안다. 툭하면 울곤 하던 중1 아이가 씩씩하게 잘 견뎌낸다. 우리는 곁에서 잘했다, 잘했다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이다. 너무 미미한 것 같으나 어떤 변화는 생겨난다.

 

기도회를 하면서 우린 일일이 아이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주께 아뢴다. 콕, 짚어서 그 아이의 어떤 점을 주께 고한다. 누군가 그 시간에 자기 이름을 부르며 주께 기도하고 있다는 걸 죽었다 깨어나도 저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싶지만 어느 훗날 저의 영혼이 주를 바랄 때 알 것이다. 자신의 그 자리가 누군가의 기도의 자리였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내 이야기다. 내가 그토록 헛짓거리를 하고 다닐 때, 그 시각 누군가 날 위해 기도했다는 걸 이제는 잘 안다.

 

사랑의 빚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살아서 나의 남은 생에 이를 갚을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이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9).” 구구절절 할 말이 많았던 게 다 그쳤다.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안에 다 들어있었다.

 

서로들 피곤에 절어 하루를 마감하는 자리에게 우리는 우리 곁에 두시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면을 들려주고 위하여 기도한다. 어쩌면 우리의 성공에 대한 열망은 그 기저에 열등감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서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다들 성공을 꿈꾼다. 너무 일찍 어려서부터 그와 같은 궁지로 내몰린다. 성적이 행복 순이 되었고, 엄마들의 자랑이 되었다. 아이들은 열패감에 시달리고 스스로 존중하기를 포기하였다. 어떤 큰 일,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이 하나님 앞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거저 받는 것에 불안해한다.

 

은혜에는 우리의 결핍만 있으면 된다. 나는 아이와 있으면서 내가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에서 아이가 나의 영혼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이 날 위해 내게 보내신 선물이었다. 이와 같은 말이 당사자인 그 엄마나 가족에게 어떻든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테지만,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숭배하는 것을 무너뜨리신다. 비로소 우리의 한계를 앎으로 주를 경외하게 하신다. 처음 사람 아담에게 두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 경계의 표석이었다. 한데 이를 무너뜨리며 스스로 그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이 죄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말이다.

 

때로는 너무 아무 변화가 없어 의심이 들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주를 바란 사람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나는 종종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한다. 저들의 숨 막히는 막연함을 생각한다. 아무런 조짐도 없는 일을 묵묵히 120년 동안이나 되풀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모른다 해도 저들은 그 미미한 변화를 알고 있었다.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서 놓여날 수 있었던 것은 한낱 여종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선지자 엘리사의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고 이는 종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아이의 삐뚤삐뚤한 글씨를 나는 사랑한다. 정성을 다하느라 흔들리고 떡이진 자음과 모음이 엉성한 것 같지만 경이롭다. 이제 새로 온 중1 아이가 내일 시험이라면서 자꾸 잔다. 곁에서 왕따인 중3 아이가 격려하고 다독인다. 과학은 포기했다며 다른 중3 아이가 내동댕이치려하자 우리의 왕따생 중3 아이가 책을 끌어다 아이 앞에 놓고 응원한다. 성격 좋은 아이의 심성을 세상은 감당을 못하기 때문에 왕따를 시킨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그리스도의 완성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바로 그 완성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론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이는 참 생명이다. 주의 긍휼을 입는 일이다.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딤후 1:18).” 내가 입은 만큼 아이들을 긍휼로 대할 수 있는 거였다.

 

이것이 증거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10).” 우리 안에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일과 우리가 누굴 생각하고 또 바라여 주께 아뢰는 일의 무게는 같다. 나의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게 아니라 저절로 그리 되어지는 자발적인 내 안의 새롭게 하심이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때로는 그 엄마들이 가장 큰 적수라. 늘 피곤하게 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든가 말든가 우린 저들의 안 믿는 부모 역할을 대신하라고 오늘 우리에게 저 아이를 맡기셨다는 걸 이제는 확신한다. 그리 이해하고 주의 마음을 바란다. 토요일 저녁 아이가 형네 가서 자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장맛비가 몹시 내리던 날, 아이는 서둘러 서울에서 내려와 교회를 가는데 아이엄마는 집에서 혼자 기타를 치고 있었다고 했다. 피곤하여 교회를 가지 않았다는 아이의 말이 피곤하게 전달되었다.


아, 이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이라니!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그런 걸 뭘 그리 애쓰고 수고하여 자기만족에 겨워 살아가지 못해 안달일까? 이에 바울 사도는 당부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 사랑이다. 주의 사랑 말고는 답이 없다. 내가 이 아이를 무슨 수로 사랑하겠나?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왕따시키는 세상을 우리 의지로 사랑할 수 있겠나? 긍휼히 여길 수 없어서 긍휼히 여김을 바란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성경의 놀라운 비밀은 내가 나의 결핍을 가지고 나올 때 주가 채워주신다. 은혜란 그처럼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다.

 

받은 자의 은혜는 거저이고 주는 자의 은혜는 그 값이 어마어마하다. 주는 자로 살 수 있는 길은 받은 자로 사는 길뿐이다. 나는 이제 기도노트에 누군지도 모르는, 딸아이 회사 사람 어느 대리의 이름을 적고 저의 난소 근종 제거 수술을 위해 기도한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아이엄마의 조급하고 표독스런 성미를 놓고 기도한다. 누가 지금 그 시간에 자신을 생각하며 주께 아뢰고 있을 거라 저들은 상상이나 하겠나? 비로소 오늘 나의 자리가 그 은혜의 자리인 것은, 언젠가 누군가의 기도의 자리였다는 것을 이제 나는 확신한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다른 길은 없다는 데 이제 안도한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2).” 이보다 더 확실한 감사가 또 있겠나?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5).” 어떤 조바심과 근심, 걱정을 들고 주 앞에 선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6).” 이는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7).”

 

곧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11).” 그러므로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