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6-27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편 74:16-17
무더운 하루였다. 이제 초복이나 한참은 더 견뎌야 한다. 아이는 또 물건을 잃어버렸다. 전날 배드민턴을 치고 라켓을 두고 온 모양이다. 새벽같이 가보았으나 없었다. 그 때문에 30분은 늦어서 왔다. 시무룩하여 답답해했다. 네 개 중 하나를 잃은 거였다. 하나는 줄이 헐거워 버려야 할 것이니 아직 두 개가 더 남았다. 나는 그리 설명하면서, 누가 정 필요해서 네 것을 하나 주었는가보다 말해주었다. 핸드폰을 곁에 두고 찾는다. 붓 펜을 손에 들고 두리번거린다. 가끔씩 시선을 놓쳐 사람을 당황스럽게 한다. 말은 횡설수설이다.
아이는 2박3일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돕고 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요점은 좀 더 기도하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렸고, 아이들에게서 참 배우는 게 많았다는 것, 힘들었지만 유익했다는 것을 들려주었다. 이 말을 하다 저 말을 하고 저 말을 하다 다시 이 말을 하느라, 한참을 이어지다 새로 이어지고 이어지를 반복하면서 말은 말 위에 겅중거렸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아이와의 대화가 전전날에 다녀간 선생의 논리 정연한 논쟁의 말들보다 정겨웠고, 늘어지게 자기 생각만 일삼는 여느 사람들의 지껄임보다 즐거웠다. 기도를 더 하지 못해서 아쉬웠어요. 아이들이 저에게 새 힘을 주는 것 같았어요.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6-27).” 내 앞에 두신 이 아이에 대하여 나는 무얼 어찌 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를 쳐 복종하게 함은 주가 내게 보내시는 것이라. ‘왜’라는 질문에 얽매이지 않음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긴장되고 때론 힘겹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 중3 아이, ‘양치기 소년’ 같은 애가 어느 수기 공모에서 또 가작을 탔다. 상금이 30만원이다. 전국에서 뽑힌 것이다. 아이가 들떠서 전화를 했다. 불행하다는 둥 그래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는 둥 글방에 그만 오겠다는 둥 몇 번을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더니, 내가 더 속이 수련하였다. 전에 입상하였을 땐 뒷걸음질 치다 개구리 잡은 것처럼 시큰둥하더니 이번엔 좀 다른가. 아이 목소리가 들떠서 나 역시 좋았다. 혼자 끙끙 앓던 이야기가 그런 가운데서 서로의 사랑을 알아가는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이 되었다.
어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히 눈치라도 챌 수 있을까? 좀 안다 싶을 때 영락없이 나의 헛되고 어리석음을 입증하시는 것 같다. 퉁퉁거리며 자기 고집으로 드세게 굴 땐 영락없이 그게 내 이야기라. 아이가 가장 꼴 보기 싫을 때가 거기서 내가 보이는 때이다. 나 같을 때 가장 어렵다. 그래서 주를 바라는지. 어제 아침 묵상하였던 말씀은 이를 계속 일깨우시는 것 같았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고전 8:2-3).”
얼마나 자주 나는 다 안다고 여기곤 하는지. 그럴 때면 내가 바라고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뿐인 것을 알게 하신다. 아이 하나 저 애를 받는다는 것은 그 애 전부를 받는다는 것과 같다. 그 애 가족은 물론 만나고 사귀고 헤어지기를 반복하였을 친구들과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고민과 앞날에 대한 걱정은 물론 몸에 밴 습관과 그 성격을 형성하고 있는 기질적인 고약한 완고함까지도. 한 사람을 마주한다는 건 그의 주변까지도 감싸 안아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친절한 타인으로의 너와 나일 때는 모른다. 그저 저 편에 서 있는 것으로는 말이다.
아, 이는 명령이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 길이 협착하여 서로 부대끼지 않으면 안 된다. 멀찍이 큰 길에 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굳이 내가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을 땐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지체가 아니다. 싫어도 해야 하는 것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가볍게 나누는 인사 정도의 것이 아니다.
곁을 함께 하고 있는 저쪽 조산원이 마사지업장으로 들어오려는가. 시설을 뜯지 않고 사람을 받으려면 그런 업종밖에는 없기는 하겠는데. 야한 여자가 기둥서방 같은 남자 둘과 와서 장소를 한참 둘러보고 갔다. 공연히 신경이 쓰였다. 주의 사람이 너무 과하게 일을 벌이다 손을 떼자 얼씨구나 하고 세상 것이 꼬이는가, 싶었다. 마음이 좋지 않아 주께 구하였다. 어찌하시려는가. 그리 되면 교회는 어찌해야 할까. 옆으로 노래방과 마사지업소라니. 나는 하나님께 할 말이 많았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주인은 우리가 나간다고 할까봐 은근히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저녁에 모여 기도회를 하면서도 이래저래 생각이 많았다. 주가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한 사람이 들고 나는 일에도 억장이 무너지는 사연들이 함께 오는 법인데, 하물며 곁을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 업소라면. 주의 것이다 주가 마련하셨고 경계를 정하며 주가 만드셨다. 혼자 끙끙 앓듯 생각이 많던 것에 대하여 이 아침, 말씀은 뚜렷한 길을 제시하는 것 같다.
결국은 부르신 이를 바로 아는 앎이 보배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우린 늘 궁지에 몰린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유함이라. 그게 무엇이든 또한 어떠하든 주의 것이라. 주가 마련하셨고 경계하시며 정하신다. 또한 옮겨야 할 시간이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것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마땅히 갈 길을 알게 하시는 이시다.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출 18:20).” 그러므로 행할 것을 알게 하신다. “전에 라이스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삿 18:14).” 다만 나는 내가 가진 믿음의 분량대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은 품지 않는 게 지혜겠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하나님이 하신다. 정하시고 경계하시며 다루시고 세우신다. 아이를 곁에 두심은 저들에게 우리가 빛을 비추어야 하는 일이라, 다만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주시는 나의 한 날에 충실하다는 것. 때론 견디고 때론 참고 이겨내면서, 스스로 ‘왜’라는 질문에 시달리기보다 주를 온전히 바라는 일.
조산원의 늙은 사모는 평생 자신이 일궈온 일에 대해 자부하였는가, 너무 무리하였다. 채 일 년도 안 돼 수천만 원을 들여 꾸민 것으로 누가 세상 즐거움을 일삼는 마사지업소가 될 줄 알았겠나! 아무에게도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나 혼자 교훈이 컸다. 마땅히 생각할 것 이상을 품었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자식과 신랑의 목회를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자기 논리 때문이었다. 여태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자긍심이 안 믿는 누구에겐 도리어 욕이 되어 더 주를 멀리하게 하는 핑계가 되게도 하였으니. 좀 과하다 싶었고, 아무리 그래도 그런 소릴 자기 입으로 할 말은 아닌데,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다.
어떤 두려움 같은 또는 교훈이 나를 붙들어 앉히시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안 하니만 못한 게 있다. 꼭 보면 맡기신 믿음의 분량,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이 문제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과업으로 삼아 자신을 앞세우려할 때 여지없다. 가차 없다. 그러니 이제 그 여파가 우리 교회에도 생기게 된 셈이니, 어쩐다? 마사지업소를 나란히 하고 들고나는 길에 노래방이 있으니 졸지에 궁지로 몰린 셈이라. 마음이 답답하여 주께 아뢰었다. 교회이게 하시기를. 어쨌든 또 아이들이 오가는 길목이고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사도 된 바울은 일갈한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3).” 너무 의식할 거 없다, 휘둘릴 일 아니다. 나의 달음질은 거기에 있지 않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24).” 그러므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
말씀 앞에 가만히 오늘 나의 형편을 놓아둔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6-27).” 결국은 내가 큰 난제로구나. 이 마음을 어쩌면 좋을꼬. 나의 쇠약함을 주가 아시나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내가 무엇을 의지할까?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요, 내 안에 듣는 상속이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두신 상황 가운데서 주를 생각하는 일. 아이가 자꾸 정신을 놓고 있을 때도, 또 누구는 여전히 자기를 우선하여 말씀으로는 나오려하지 않는 중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 전 결혼한 부부 아이들이 카톡을 했다. 안부를 묻고 고마움을 드러내는 내용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파주 어디쯤이니 가까운 교회로라도 가라고 이르자, 자신은 무교라고 단언한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날 제일 존경한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벅차다. 뭐라 더 할 말이 없어 답을 간단히 하고 말았다.
우리 중3 ‘양치기 소녀’를 교회로 나오게 하는 일도, 초딩 5학년 두 주동자를 예배로 오게 하는 일도, 자꾸만 생각이 저 혼자 들었다 놨다 쓸려 다니는 아이에게도,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싶은 것인데, 행여 나의 행실이 그 길을 막는 것은 아닌가. 왜 자신을 쳐 복종하게 하는지, 바울의 심경을 알 것 같았다. 제일 두려운 게 자고함이라. 나로 그와 같은까봐 주는 경계하신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
말씀 앞에 고개 숙인다. 말씀만으로 붙들리기를. 말씀 밖으로 나가지 않기를.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4:6).” 이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9:19).” 그와 같은 자세로 주의 일에 참여하기를. 행여 나로 자고함이 없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시 74: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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