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27-29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시편 76:11
막연한 개념이 아니다. 어떤 구호나 선호의 문제도 아니다. 몸과 영이 떨어져서는 살 수 없으니 그래서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겠다. 또는 울면서도 씨를 뿌리러 나가는 일이었겠고. 생각이나 느낌과는 달리 몸의 지배를 받는 이 땅에서의 삶으로는 그리하여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삶이 그리스도인이었다. 합당하게 자신을 살펴 또한 저들에게 살과 피로 나뉘는 생활이 이어져야 하는 것이겠다. 분별할 수 있는 영이 있어 귀하다.
오후께 아이가 돌아가고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였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로 로마서 6장의 말씀을 묵상하였다. 그 가운데 20-23절의 말씀을 붙들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20).” 역설적이며 상당히 은유적인 표현이다. 내가 죄를 벗삼아 살던 때에는 오늘의 ‘이와 같은 일들’에 어떤 관심이나 있었던가? 굳이 그때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 뜻을 헤아려 알려고도 않았다. 주의 도우심은 당연히 일반론적인 것이었다. 기도란 막연하여서 그리 바라는 것으로 그쳤다.
그런데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4-36).” 그리 세상에 얽매여 사는 게 종노릇이었다. 사람에게 조급하고, 어떤 일에나 초조하였다. 당장에 어떤 결과를 바랐고 이를 원하다 싫증이 나면 금세 다른 것을 구했다. 로또처럼 늘 한 방을 노렸다. 아이들을 대하는 일이란 늘 그 정도여서 홀가분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자유함은 그 모든 얽매임에서 놓여나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이와 거꾸로 살던 시절이 아찔하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에게 종노릇한다는 것, 그것은 주의 사랑으로 하는 일이다. 섬김이란 주의 마음을 담는다. 저 아이를 대하고 위하는 것은 주가 사랑하시는 영혼이기 때문이다. 아이와 같이 요한복음 17장을 읽으며, 예수님의 기도에 담긴 내용을 공들여 설명하였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하나님이 예수께 주신 영광은 성령으로 더불어 아버지를 찬송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나 되게 하신 것도 주님께 하나님 안에서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이다.
곧 우리가 주를 바라고 주께 감사히 찬송하는 일. 범사에 주를 인정하고 그 뜻을 바라고 구하는 일. 나는 아이의 마음이 주 안에서 그러하다고 확신한다. 아이가 아멘, 하는 것이 누가 시켜서 되는 게 아님을 말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마땅히 우리가 취하는 최선인 것이다. 왜냐하면 저를 주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값없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내 안에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함은 안 믿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감당할 수 없는 자유다.
가장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안다. 이는 말로다 설명할 수 없다. 때론 내 자신도 내 마음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 안에 드는 자유다. 이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9).”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같이 아멘, 하는 아이를 보며 기뻐하였다. 이는 곧 부끄러움을 아는 자유다. 이제는 예전에 알던 것으로 즐거움을 삼지 않는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 6:21).” 뜬금없이 안동에 사는 동기 형님이 전화를 했다. 대학 때 그처럼 같이 돌아치며 놀던 사이다. 다짜고짜 경상도 사투리로 욕부터 하는 저의 말투가 정겹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과 같지 않은 것이다. 관심사도 다르다. 서로 가는 길이 같지 않다. 저는 ‘같은 신앙’이라 강조하며 불교도인 자신의 것을 내게 디밀었다.
철없는 시절의 관계가 아니다. 낼모레 환갑이라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언제 우리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 함께 낄낄거리며 좋아하던 것들에 대하여 이제는 부끄러워한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렘 31:19).” 차마 글로 옮겨오지 못할 정도로 음란했고 몰상식했으며 짓궂었고 기고만장했다. 그 나이 때 다 그렇지 뭐, 하고 넘기기에도 내 안에 이는 부끄러움이 크다. 한데 여전하여서 또 똑같은 말투와 관심과 살아가는 모습이 두렵기까지 하였다. 내가 돌이키지 않았다면 나 역시 여전하였을 생의 반경을 생각하였다.
그러니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12:13).” 여전히 장가를 들지 못하고, 말끝마다 씨팔씨팔거리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하이에나 같았다. 지방지 기자라는 직업이 그렇기도 하겠으나 그게 또 권력이라. 평생을 건들거리며 사는 것 같아서 예전에도 이를 놀려대곤 했었다. 그런데 벌써 낼모레가 환갑이라니. 여전하여서 철딱서니 없기는 다를 바 없는데, 어쩌나? 그 인생이 그대로 저물고 있는가.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겔 36:32).”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가 사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6:14).” 이를 이제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말씀 앞에 앉아 몸가짐을 바로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뭐라 한들, 그게 우리 임의로 들려지던가?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새삼스레 선생과 연락이 이어지고, 이 형님 또한 삼십여 년 만의 연락이라 놀라웠다. 어디로 출장 가는 길에 인천공항으로 가면서 내 생각을 하였다나. 나는 문득 심고 거둠의 원리를 생각하였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여전하여서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정겹다가도 저이가 벌써 환갑이라는 데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너는 목회 활동은 잘 하고 있고? 하는 저의 말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간간히 누구를 통해 전해들은 것이어서 굳이 내가 뭘 설명한들. 살면서 과연 우리는 누구의 종으로 사느냐의 문제였다. ‘죄의 종과 하나님의 종’ 가운데 본문은 이를 명확히 구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사는 날 동안 이 말씀의 의미 앞에 설렐 수 없다면 불행이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선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 어떤 일도 선이라 할 수 없다. 나라를 구하고 누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준다 해도,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해도, 우리는 저를 의인이라 하고 성인으로 추앙하곤 하지만 선이 아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그리하여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거하는 일에 대하여, 말이 어줍고 기억력이 모자란 아이와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참고 견딜 수 있는 일이 목회였구나. 저들에게 어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도,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7-8).” 한 영혼으로 씨름한다는 게 누구를 위해, 누구를 바라고 하는지 명확해진다. 정작 이 일은 아이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날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주께 향한 마음이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아,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그 증표를 가진 자였다. 돌이켜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그러했고 더는 그것으로 종노릇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또한 그 때문이었다. 죄의 값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조각 글을 쓰듯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아주 오래 전 친구와 통화를 하고 아이와 오전에 나누었던 이런저런 말들이 중첩되면서 내 영혼이 이제 무엇을 즐거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는 다 하나님의 은사다. 나는 주의 ‘교훈의 본’이 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 말씀 앞에 감사를.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자중할 수 있는 게 복이었다. 이를 알면 오늘 주시는 말씀이 더욱 귀한 것을 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어찌 더는 그렇듯 살겠나? 세상을 향한 마음이 부끄러움뿐이라. 그래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7-29).”
그러할 때 오늘의 나를 또한 내어주는 삶으로 가능하겠구나.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시 76:11).” 나를 이끌고 날마다 모리아 산으로 오르는 아브라함의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주께 구하고 그 구함을 갚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켰던 것일 테고, 다윗은 울면서도 씨를 뿌리러 나갔을 것이었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7).”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온전히 알리라 (0) | 2018.07.21 |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0) | 2018.07.20 |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0) | 2018.07.18 |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0) | 2018.07.17 |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0) | 2018.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