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전봉석 2018. 7. 18. 07:11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시편 75:1

 

 

누구나 그 우월감 밑에는 두려움이 깔려있다. 또는 유난히 바쁜 일상은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한다. 노모는 우울증에 겨워 식사를 도통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친은 이를 단지 그러려니 하고 있다가 급기야 강제로 병원에 데려가 영양제를 맞추었다고 했다. 그런데 저들에게 한꺼번에 주문이 들어오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여름철엔 비수기라 공사용 물품 주문이 뜸할 거라던 게 그리 바쁘게 볶아쳤다. 얼마 전에 본 노모의 삐쩍 마른 몸과 시커먼 얼굴이 떠올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주의 부르심이다.

 

안 믿는 사내를 만나 평생을 그 슬하에 매여 사느라 온전히 신앙을 붙들지 못한 터. 외형적으로는 믿음 좋은 여동생들 자식들보다 번듯하니 일가를 이뤄 사업도 규모 있게 돌아가는 것 같으니까 뭐라 할 말이 없고. 부친은 이를 빌미로 우쭐하여 저들보다 우월감을 과시하며 믿는다는 이들의 어설프고 무능력함을 비판한다. 한데 그 생이 늘 고단하였으니 당신 앞으로 이제 세 채의 집이 있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일상의 고달픔에 신세한탄은 여전한 것이어서, 나는 바삐 서두는 이에게 차가운 허브 차를 한 잔 권하고 주의 이름을 불렀다.

 

그 기저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화근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데 따른 두려움과 불안이다. 한사코 부인하지만, 그 안에 평안이 없어서다. 자기만족으로 충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완고함뿐이다. 자신이 되레 믿는다는 이들보다 낫다는 데 비교하는 것이 자기위로뿐이어서 저의 속엔 주의 평안이 없다. 모친의 오늘 상태는 잃어버린 평안에 대한 하나님의 신호다. 나는 단박에 그리 알 수 있었다. 그 아들의 자기주장도 걸림이 되는 것이었으니 차라리 저들도 없는 형편이었으면 더 나을 걸 그랬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몹시도 더운 날이었다. 선풍기를 코앞에 대고 돌려댔다. 글씨가 날려 하나하나 받침을 해두고 글을 썼다. 말씀을 손 글씨로 옮겨 적는 풍성함이 대단하다. 심리적인 안정은 물론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의미로 풍성하였다. 기도노트에 저의 제목을 적었다. 우리에겐 주의 이름이 가깝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도 주의 일을 알 수 있다. 알려주고 싶은 만큼 알게 되는 교훈이 크다. 나서서 내가 모친의 우울함이나 섭생에 문제가 생긴 일에 대하여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위하여 기도하게 하심으로 그 의미가 내겐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한다.’ 안 믿는 자들에게도 그러하겠으나 믿는 자로서 그 의미는 더욱 생생한 것이다. 우리 중3 아이가 들뜬 마음으로 와서 모처럼 환히 웃으며 글을 더 열심히 써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와 직접 전화를 걸어 가작 입상을 확인하고 시상식 때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뿌듯하면서도 안쓰러웠다.

 

행여 자기가 쓴 이야기를 부모가 알까, 하여 가명을 쓸까, 하는 아이에게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서로는 숨기고 사는 게 너무 많다. 그 속을 다 알면 누가 먼저 미치든가,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왜 그러고 사니? 하고 묻고 싶은 게 어디 아이에게 뿐이겠나. 종일 일에 쫓기며 사무실을 비우고 들락거리는 부친의 수고함에도 묻고 싶었다. 집이 세 채인들 뭐하나. 그 수고는 평생을 소처럼 일하다 등골이 휠 판인데도 저의 종노릇함을 마땅히 여기고 사는 것이었으니. 아이는 다짐을 하듯 책임감을 운운하더니만 결국 돌아서기 무섭게 할 일을 미뤘다. 당장 또 지금 즐거움으로 족한 것이다.

 

곁에서 일어나는 일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더욱 선명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같이 모의하여 자해를 공모하였다 하여 학교에서는 저들 셋을 따로 분리하듯 그 부모에게 함께 어울리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다면서, 미술치료를 같이 한다. 오히려 끝나고 같이 어울려 놀기 좋게끔, 그러니 모든 게 다 시늉이라. 책임을 전가하고 혹시나 하는 문제에서 자신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 찔끔 눈을 감는다. 그러니 어쩌겠나?

 

이 모든 게 우상숭배라. 먼저 위하고 바라는 게 있어서다. 하나님은 다음 차례이기 때문이다. 다음이 그 다음으로 밀려 늘 다음이라 손에 닿지 않는다. 아이에게 교회에 오라하면 다음에요, 하는 게 인사다. 부친에게도 그러그러하니 어머니 모시고 같이 주일에 교회에 가시라 해도 껄껄 웃으며 다음에요, 한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7).” 오늘 말씀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그리 단정하였다.

 

하나님은 구름과 바다 가운데서 우리에게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먹이셨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4).” 젊어서 안 믿는 남자가 좋아서 부득불 그리 결혼을 하였으니, 그 생의 고달픔에 대해서 이제와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여전히 그 고집을 꺾지 못해 혼자 처량한 것이었으니 안 믿는 큰아들과 남편의 주장이 모친을 시름시름 앓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단박에 알겠다. 목회자의 처로 살았다는 여동생의 노년이 황망하게 되었으니 안 믿는 이들의 구박이야 당연한 것일 테고. 목사로 살던 이가 중년에 여성도와 불미스러운 일로 교회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였으니 그 면이 또 말이 아니라.

 

저들은 자신들이 안 믿는 이유를 그런 데서 찾고, 모친은 중간에서 면구스러워 뭐라 말도 못하고. 이제 남은 생은 얼마 없으니 그 발걸음이 조급하긴 한데, 그 영혼이 오죽하겠나. 그러한 심정까지도 주 앞에 내려놓지 않으면 짊어지고 가야 할 판이니 얼굴은 꺼멓게 죽었고 몸은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아 삐쩍 마른 가운데 우울감만 더해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저녁에 모여 저들 이야기를 나누며 위해 기도한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가장 최전방에서 전투를 벌이듯 아내는 아이들 하나하나에 골머리를 앓는다. 자꾸 누가 아프고, 어떤 아이는 연기처럼 휙 사라지고, 애써 공들였다 싶으면 졸지에 무너져버리기 일쑤고, 가깝든지 멀든지 한껏 저들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었던 말들이 역으로 돌아와 공격을 하곤 하니 우리가 무엇으로 이를 방어할까? 별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더욱 강하고 담대함을, 주가 두시는 마음으로 안타까운 것이라면 저를 대신하여서도 애통함으로 주께 아뢰는 수밖에. 엄마들의 잔혹한 이기심과 아이들의 무덤 같은 무기력증에 치를 떤다.

 

이는 다 우상숭배라, 사는 게 우상이 되었다. 자기숭배의 시대다. 오롯이 자기만 위한다. 서로의 관계는 무너져 신의는 사라진지 오래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까닭은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고 가까이 오는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니. 참 신기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이란 보도블록 사이에 낀 조뱅이풀처럼 생명력이 질기다. 언제 그랬냐는 듯 명랑하게 웃어주는 얼굴에 한시름 놓고 덩달아서 웃는다. 주가 두시는 일이다. 우리에게 맡기시는 사랑이라.

 

약속에 따라 주가 건지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아무리 세상이 두 쪽이 나도 또한 피할 길을 주실 것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에 분명한 명령의 말씀이 있었으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것.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있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6:13).” 예수님도 당하시는 고난이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하나님이시면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신다는,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5:8).” 이는 순전히 날 위한 것으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9).” 그러므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다.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10).”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그 길이 훤하다.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온갖 어려움이 실은 어려움을 위한 어려움으로만 끝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어떤 고통이든 고통에 지나지 않는 고통은 없다. 이를 외면하면 반드시 더 큰 고통과 마주해야 한다. 내가 자주 아이에게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친구에 대해, 그래서 외면한다고 할 때 앞으로 그런 애들이 차례로 온다. 누구에 대해 유난히 싫은 까닭은 그게 곧 자신이어서 그렇다. 자신과 닮아서 자신으로 힘에 겨운 게 자기를 숭배하는 자의 덫이었다. 별 수 없는 일이다.

 

저쪽 부친의 자기 합리가 늘 자기 발목을 잡고 있으니, 늘 보면 ‘다음에요.’ 하고 미뤄두다 어느새 일흔이라. 노모의 질병이 경고임에도 안 믿는 자식이나 믿는다고 큰 교회에로 유한마담처럼 드나드는 며느리나 그 본질은 외면한 채 설마, 하는 것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해도 그 말에 또 설마, 하는 것이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이 모든 일상이 교훈이라, 훈계라. 주의 말씀이었다.

 

내가 아이를 두고 생각함은, 저 노부부의 구구한 사연을 들으며 생각하는 것은 주 앞에서의 나의 자세다. 온전한 신앙을 구하는 일이다. 내 힘과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늘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는 주 앞에 선다. 두려움으로 외식하지 않는다. 다른 위안을 더하려하지 않는다. 어떤 위로를 찾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이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곧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4).” 날마다 우상의 시대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15).”

 

말씀 앞에 앉아 주를 바란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시 75:2-3).” 실로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8).” 그러므로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