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전봉석 2018. 7. 24. 07: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린도전서 16:23-24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시편 81:9

 

 

 

얼마 동안 미뤄오다,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이른 아침부터 아이는 이를 문자로 확인하고 들떠서 왔다. 우리는 먼저 성경공부를 하였다. 어느새 요한복음의 끝부분을 읽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죄가 없으신 걸 알면서도 왜 저들이 죽이게 내어주었는지, 아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며 궁금해 했다. 앞서 유다가 예수를 팔았을 때도 아이는 이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아니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랄하기까지 한지, 결국 누구도 선하지 못하고 선할 수 없음을 말해주었다.

 

우리는 먼 길을 걸어서 영화관에 갔다. 예매를 하고 같이 식사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약재상도매창고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며, 갑자기 면접을 봐야 한다는 거였다. 서둘러 영화표를 취소하고 글방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정식으로 취업이 되었고 다음 날부터 바로 일을 하게 되었다. 잘 됐다. 서로 축하하고 좋아하는데 마음 한편은 어떤 슬픔 같은 또는 염려가 밀려들었다. 하필 그때, 누구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일찍이 대학생 시절 용접공으로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평생을 자신의 신념과 올곧은 가치관으로 살아온 이였다.

 

댓글조작사건을 수사 중에 돈은 받았으나 청탁은 없었다며 억울한 심정을 호소하다, 노모가 사시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나름 저의 판단과 기준을 신뢰했다. 그리고 저가 가지고 있는 청렴과 신의를 좋아했다. 가장 어려운 군소정당에서 소신을 다해 의정활동을 하던 이였는데, 여러 개의 기사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저 한낮의 무더위에 누군가 퍼뜨린 유언비어가 아닐까, 하고 믿기지가 않았다.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허망하고 답답하여 뭐라 말하기 힘든, 어떤 슬픔 같은 또는 실망감이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오후께 대학 때 동기들 단톡방에 <광장>의 저자인 소설가 최인훈 선생이 향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한참 때 소설을 쓰고 싶어 ‘소설 창작과 이론’을 두 학기 들었던 기억이 있다. 워낙에 꼬장꼬장하고 예외란 게 없어서 늘 저의 강의시간은 긴장되고, 실기실습 시간에 낸 나의 소설을 가지고 수업할 때는 지금도 그때의 떨림과 기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서로 시간을 맞춰 언제들 같이 문상을 간다는 여러 개의 글이 올라왔으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사에 실린 저의 노년의 얼굴이 젊은 시절 내가 알던 그이가 그인가, 낯설어하는 마음뿐이었다.

 

삶의 허망함에 대하여,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우리의 신념이 다 무엇이고 나름의 가치와 이상은 또 얼마나 허망한지. 그처럼 스스로의 죽음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할 정도로 자신에게 있어 자신의 생은 당당하였던가? 뒤에 남겨진 늙은 노모는 어쩔 것인가? 그의 가족은? 저를 지지하던 사람들의 응원과 기대는?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4:2).”

 

사람을 보면 나는 절망한다. 그렇다고 내가 뭐 그처럼 정치적인 인물도, 대의를 품고 사는 대단한 위인도 아니지만, 앞서 대통령을 지낸 이의 자살도 또 이번에 저이의 그 허망한 죽음도, 그냥 자꾸 화가 났다. 고작 그 정도인 것을, 그쯤이면 될 것을 마치 이슬만 먹고 사는 위인들처럼 이 무슨 짓들인지!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나는 오후 내내 서글펐다. 누구의 잘잘못을 운운할 것도 없다. 다 그 놈이 그 놈이라. 너는 좀 나으신가? 그래서 깨끗하신가?

 

성경의 본질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떻게 하셨는가’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이신 것은 결국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벼운 인생의 무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다그쳐 묻는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갈 3:4).” 살면서 누군들 괴롭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으며, 이는 예수를 믿는다고 덜하고, 자신의 신념을 붙들고 산다고 덜하지 않다. 나름은 애써 수고하는 게 인생이겠으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5).”

 

차라리 노년에 대장암으로 투병하느라 그 고통은 가중되었으나 주어진 그 생을 다하고 돌아가신 늙으신 선생의 향년 84세의 일기가 위대하였다. 뭘 어떻게, 얼마큼 당당하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얼마나 기대하며 살아야 옳은가? 성경은 결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데 따른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러니까 ‘우리의 할 바’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신 일’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바 된 그것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듯 단순하고 명료하게 느낀다. 아이가 취업이 돼서 참 감사하고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염려가 또 슬픔이 앞서던 마음이었다. 나름 좋아하고 관심을 두던 이가 그처럼 허망하게 생을 달리한 것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황당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늙으신 나의 은사가 그 생을 다하고 돌아가신 데 대한 황망한 마음이었다. 그러할 때 말씀으로 나를 붙드시는 것이었으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 16:23-24).” 아멘. 축복이 내 것이었다. 그러니 말씀은 이르신다.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시 81:9).” 온갖 곁가지가 되레 원줄기인 것처럼 굴어서 이를 붙들었던 것인데 아뿔싸! 그 가지는 맥을 못 추고 부러지는 것이다. 버틸 줄 알았다. 어떤 난관도 어려움도 잘 극복해온 위인이라 여겼다. 한데 고작 스스로 청렴하였던가? 자기만족에 겨운 생이었던가?

 

그리고 나에게 되물으신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아찔하다. 한순간이다. 뭐 그리 잘난 줄 알고 대단히 여겨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니 맞서는가 싶었더니,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시 12:8).” 상대적으로 누구를 비난하며 욕할 거 없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03:15).” 잘난들 뭐가 그리 대단할까? 내가 어찌 잘 살고 있는가에 대해 성경은 묻지 않는다. 다만 믿음의 결과를 본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고인의 명복을 빌고 평안한 영면을 바라지만 이 또한 부질없는 소리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인사하지 않는다. 오직 성령으로 나지 않은 것은 다 그뿐이라. 거기까지다. 성령은 성경을 떠나서는 역사하지 않고, 성경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전달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의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지 않고, 성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을 말한다. 하나님의 일을 들려준다.

 

더 열심히 잘해보라는 게 아니다. 뭐라도 해서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를 붙들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더 열심히’ 살았다 해서 그 생이 복음에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은 저의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갈 3:6).” 고로 오늘 나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7).” 저와 함께 받은 복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

 

오늘 말씀은 나를 강하게 붙드신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이는 그저 막연한 믿음이나 괜한 각오가 아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4).” 내 안에 두시는 사랑이 그 출처다. 아이가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상황을 카톡으로 알려왔다. 성경공부를 계속 이어갔으면 하고 답을 하니까 토요일에도 좋단다. 평일에도 다섯 시에 퇴근이니까 글방으로 왔다가 집에 가면 된다고 하였다. 아이의 그와 같은 말이 가슴을 벅차게 하였다. 어떤 고마움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하나님이 어찌하시려는가. 그러자. 그렇게 하자. 아이의 카톡에 대꾸하면서 나도 모르게 입을 삐쭉거리며 눈물이 글썽거렸다. 도대체 이 마음의 출처를 성령에 두지 않으면 어찌 이해할 수 있겠나? 밥이 나와 떡이 나와! 은근 귀찮고 성가시고 신경 쓰여, 아이가 오는 날이면 아침에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리고, 어제는 같이 영화를 보러가면서 몰래 다른 날보다 신경안정제를 일찍 챙겨먹어야 했으며, 늘 같이 있는 동안에는 내가 더 긴장하던 일이라. 얼마나 홀가분하고 시원섭섭한 일인가. 한데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은 내 것이 아니었다.

 

오늘 말씀은 이를 다독이신다.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20).” 그리고 일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23-24).” 아멘. 그러므로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시 81: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0) 2018.07.26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0) 2018.07.25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0) 2018.07.23
질서 있게 하라  (0) 2018.07.22
내가 온전히 알리라  (0) 2018.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