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질서 있게 하라

전봉석 2018. 7. 22. 07:18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고린도전서 14:33, 40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편 79:13

 

 

폭염으로 하루가 질척거렸다. 아이는 그래도 제 시간에 오려고 신경을 쓴듯하여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도 밝아지고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별개였다. 자꾸 자신을 이겨내야 한다는 말을 해주다 나에게 들려주는 소리가 되었다. 길바닥은 이글거렸고 햇살은 작렬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처럼 말씀 앞에 앉을 때, 한 날의 괴로움이 그 날에 족하는 말씀을 알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내일이 내일 일을 염려할 것이란 말씀이 남의 일처럼 들려지는 것은 왜일까?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롬 4:6).” 나는 늘 송구하면서도 놀랍도록 감사하다. 다들 참 어렵게들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이리 괜찮아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평안이 있다. 아이를 대하며 그 작은 변화에서 대견해하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지 알 것 같았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 1:4).” 나는 아이가 주일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아이에게 말하고 주께 고한다. 그러나 그 일은 내가 어찌 도모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럼에도 주의 마음으로 아이를 위하고 대할 수 있기를 놓고 기도한다. 아니면 참 싫증나는 아이다. 내가 지금 이 애랑 뭘 하고 있나, 한심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이 견딤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일이다. 우리의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힘에 겨운데, 틀림없이 짜증도 일고 화딱지도 나는데 아이를 미워할 수 없다. 한 날의 고역이 못 견딜 정도는 또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바란다는 것.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주를 안다는 일은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지는 어떤 충만함이었고, 이는 생각과 달리 행동으로 이끌리는 능력도 함께 부여되는 일이다. 내가 아이를 대하는 일이 실은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이다. 늘 말대꾸에 되도 않는 자기주장을 일삼는 중3, 가장 다루기 힘든 시절의 아이에게 나는 기어이 주의 사랑을 나타내고 일궈가는 사명을 다 해야 하는 것이다.

 

일일이 아이에 대해 열거하자면 욕이 한 바가지라. 그러니 어쩌겠나? 이를 또한 품고 가야 하는 일이어서 오히려 내 안에 드는 그와 같은 마음이 신기할 따름이다.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할 것이다. 먼저 살면서 나이 들었다 하나, 그것으로 선생이고 어른일 수는 없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65:20).”

 

모든 주의 일은 단계가 있다. 내가 조바심 낸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종종 나는 아이도 교회에 나오고 누가 또 누가 함께 또 그렇게 주일을 기억하여 교회로 나오는 상상을 한다. 단지 상상으로만 그칠 일인지 주께서 이루어 가실 세계인지, 이 모든 게 주께 속하였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11:10).” 곧 주가 모르시리니,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11).”

 

곧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33, 40).” 그러므로 품위 있게, 조바심 떨지 말고 무던하니. 아이를 대하는 일리나 내가 내 몸을 건사하는 일이나, 나는 사뭇 단순하여지는 것 같다. 아이 때문에 막 짜증이 나다가도 그럴 거 뭐 있나, 싶은 생각이 들면 이해가 된다. 저 애도 자신을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인데. 이처럼 우리 곁에 두시는 덴 다 주의 섭리와 질서 가운데서 한 과정일 것이다. 더 앞날을 나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또 맡기신 동안에는 묵묵함으로.

 

결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할 것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그러자면 진리로 단단히 붙들려야 할 일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엡 6:14).” 그렇지 않고는 내 마음이 먼저 들썽거려 흔들리기 십상이니,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15).” 복음으로 평안을 신어야 할 터,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6-17).”

 

내가 이처럼 말씀에 붙들려 사는 일은 누굴 가르치고 지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분명히 지켜야 할 것이 있었으니,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시 79:13).” 오늘도 하루를 더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아이와 오전을 보내고 한참 더울 때 아내와 딸애가 나와 열무국수를 사주었다. 딱히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일이 답하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주시는 대로 처한 상황 가운데서 묵묵히 준행하며 주신 날을 다하는 게 복이었다. 문득 이 단조로운 진리 앞에 감사하였다.

 

공의로 허리띠를 삼아야 한다. 그럴 때,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 이는 그럴 수 있는 게,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3).” 그 너머 주가 계시는 데 초점을 맞추는 일이었다. 즉 내가 아이를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아이가 달라지는 게 아니다. 아이를 보고 아이를 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 비록 주일에 예배에 나오기를 거절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이를 마다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모든 일에 선재하시는 주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이를 어찌 알게 하고, 알려준다고 해결될 문제이겠나? 다만 저 애 앞에 나를 두셨기 때문에 나는 주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뿐이다. 그리 바라고 구하는 게 일이다. 종종 싱겁고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하는 것 같아 시무룩하니 의기소침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0, 15).”

 

주만 바라자.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33).” 주가 이루실 일이다. 이에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40).” 오늘 말씀은 나의 자세를 두고 그 마음을 부여하신다. 주께 아뢰기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곧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