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편 78:72
아이가 정신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이제 복지관을 통해 어디 취업할 데를 모색하였다. 스스로는 장애라는 표현이 껄끄러운지 구구하게 말을 덧붙였다. 괜찮다, 잘 됐다, 감사하다, 아이 앞에서 그리 말해주며 달래었다. 우리가 주를 바라고 산다는 일은 좋은 일에서든 나쁜 일에서든 나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일이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하심으로 이루어진다. 당장은 이해하기 어렵고 되레 서러움과 어떤 슬픔마저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으로 조성하신다. 스물두 살, 어쨌든 한참 일할 나이였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만 산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곧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로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동안 내가 먼저 위로 받았다. 몹시도 무더운 날이었다. 강한 선풍기바람에 귓전이 다 얼얼한 정도였으나, 아이가 돌아가고 나는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들에 대해 생각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아이에게 학습과 세례를 줄 수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지금처럼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성경을 글씨로 옮겨 쓰고, 그 생각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집중하였으면 싶은데 어쨌든 사회로 나가 일을 해야 하는 처지였으니. 나야말로 어떤 서운함이 오후 내내 가슴 한편을 저미는 것 같았다. 곁을 주고 마음을 기울여 아이로 인해 주를 더욱 바라던 것이었으니, 이로써 파생하는 마음이 귀하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아이 때문에 다시 시작하게 된 우리의 기도회가 아이들의 이런저런 사연을 올려놓고 주께 대신 구하는 일이 되었으니.
속속들이 저들의 사정과 형편을 주께 아뢰는 일이란 그저 허무한 일이 아니라 주의 하시는 일에 더욱 집중하게 하는 것이었다. 스치듯 그냥 왔다 사라지는 관계란 없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주를 더욱 붙들며 늘어나는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주께 아뢰고 고하기를 대신하면서 그 일은 어느새 우리 일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여김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 그리 두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며 그리 여겨 그에 걸맞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가 저들을 위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 다시 말해 무엇으로 우리를 지배하게 하느냐. 성령의 내주하심이란 우리의 받음과 성령의 들음이 함께 하는 일이었다. 이를 거역하고 거부할 때 성령은 기다리신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같은 자리를 맴돌 듯 그 광야는 고되고 모질 따름이다. 이는 몸의 사욕에 휘둘리는 것으로 원망과 불평과 불순종을 낳을 뿐이다.
이와 같은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실질적으로 내 몸을 드려야 한다. 막연한 느낌이나 그와 같은 생각으로가 아니라, 나의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 처음 설교 원고 초안을 잡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도 못한 깊이의 말씀이다.
문득 여기 세 가지 타동사 ‘여기다’와 ‘지배하다’와 ‘드리다’에 꽂혀 말씀은 전혀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시는 것 같았다. 내 몸을 드린다는 행위는 그 대상이 뚜렷하여 어떤 목적에 참여하는, 동사 ‘드리다’이다. 내 몸을 드리는 것은 실제적인 삶의 이양이다. 생각이나 느낌으로가 아니라 이 시간에, 여기에서, 이 일을 행하도록 내 몸을 내어드리는 일. 아이의 장황한 이야기에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이며 속으로는 주를 바라는 대화는 그 자체로 기도였다. 아이가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보다 주께서 무얼 듣게 하시는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으나 다만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을 의뢰할 수 있는 길은, 내 몸을 사용하시게 하는 일이다. 각오나 다짐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의 쓰임이었다. 어디가 아프고, 어떤 사정이 있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지경에서도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하실 때 내어드리는 일. 문득 떠오른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얼마나 황당하고 무서운 일이었을까? 처녀로 잉태하는 일은 당시의 모든 제도와 관습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는 일이기도 하였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요구에 당면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하는 일이며, 모세가 바로의 왕궁을 떠나 주의 부르심에 합하는 일에서도. 어떻게 저들은 자신을 그처럼 드릴 수 있었을까? 어김없이 그리 ‘여기는’ 동사가 우선하였다. 관념적으로 그리 알고 마는 게 아니라, 그래서 더는 죽을 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일이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내 몸을 ‘드리는’ 일이다. 나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와 같은 적용이 나의 삶 가운데서도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발적으로 내가 지원하여 취한 동작이 아니다. 내 안에 어떤 의협심이 발동하여 지금의 이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의도하여 주를 찾고 바라며 그 뜻에 합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보면 이게 ‘타동사’가 갖는 의미를 새롭게 가져온다. 그 대상에 의해 목적이 있어 취하는 움직임이다.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금의 나를 내어드릴 수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여겨졌다. 더는 죽의 몸의 지배를 당하지 않기를 원한다. 몸의 요구와 성령의 요구는 충돌한다.
이러할 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하는 황당한 말씀 앞에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 하는 실제적인 드려짐이 몸을 채우고 비로소 메시아를 이 땅에 오시게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돌아가고 피로감에 곤죽이 된 몸을 이끌고 말씀을 정리할 때의 이와 같은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전율을 어찌 표현할 길이 없다. 서둘러 작성한 조각 글에서도 그러했고, 이를 짜임새 있게 풀어내며 원고 작성을 할 때에도 그러했고, 이처럼 다시 되새기며 묵상할 때도 그러한 것처럼.
어쩌면 나는 아이에게 정신지체장애 3급이라 하여 괜히 생소하고 서글픈 장애 판정에 대해 생각이 많을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그와 같은 몸을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여 내어드리는 삶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해주고 싶고 가지고 있던 말이 그것이었다. 괜찮다, 잘 됐다, 감사하다, 하고 아이를 어르면서 들려주었던 말이 말씀으로 비춰지면서 그게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가장 기본자세이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누구 하나 아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노아는 말할 것도 없고 노예로 끌려간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주를 향한 마음으로 그리 여기고, 이에 죄의 종으로 지배받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 지배받는 것으로 자신을 쳐 복종하게 한 것이 그 몸을 드리는 여정이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 우리가 취하는 몸동작도 그와 같은 세 개의 타동사 ‘여기다’와 ‘지배하다’와 ‘드리다’의 간격으로 날마다 실재하는 삶인 것이다. 이처럼 토요일 아침에도 일어나 앉아 주의 말씀 앞에서 주를 바라고 구하는 일. 등짝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엉덩짝은 뜨거워서 몇 번을 어기적거리면서도,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일은 참으로 직접적이면서 구체적인 드려짐이었다.
저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 같은데 우리는 저들 노모의 우울증에 그 섭식장애를 놓고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교회를 지척으로 하고 있는 곁의 사무실을 위해 기도한다. 주의 성전이 저들에게 영광을 받는 일로 저들의 사업과 모든 일들 위에 주의 살아계심이 역사하여 주시기를. 심지어 새로 들어오게 될 마시지 업소에 대해서까지 주를 부르며 바라고 구하는 일. 너무 막연하고 희미하여 되도 않는 일인 것 같은데,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비로소 온전히 알게 될 때 희미하였던 지금을 떠올리며 손뼉을 치지 않겠나? 그래서였구나! 그게 옳았어! 하며 주께 더욱 영광을 올리는 일이겠으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거듭되는 우리의 방종과 의심과 근심과 두려움과 어떤 원망들까지도 이로써 죽을 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온전히 주의 무기로 드려지게 하시는 이에게 영광을. 그리하여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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