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전봉석 2018. 7. 27. 07:16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18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84:5

 

 

 

사는 게 참 그러하여서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칠십이 넘은 노인이 팔십을 넘긴 노인을 끌어들여 자기 밑으로 심고(?) 저를 대신하여 무얼 판매하는지 뭘 하는지, 또 그 아래로 가지를 치고 쳐서 그 아래에서 올라오는 수익금을 도로 돌려받기 위해 불러냈다나? 땡볕 더위에도 장모가 어디 가산 디지털 무슨 세미나에 갔다며 아내의 지청구가 늘어졌다. 뭐라 한들, 또 애나 어른이나 늙었거나 젊었거나 다 자기 생각에 붙들려 사는 것이겠으니.

 

뚱하니 앉아 있는 초딩 5학년 아이를 어르고 달래 잠언을 한 장 읽히고 그 의미를 적어보게 하는 일은 여간 힘겨운 게 아니다. 공부도 못하고 말 귀도 어둡고 거기에 자기 고집까지 세서 또래 아이들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만다. 거기에 병약하여 잔병치레도 잦다.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하며 성경 한 구절을 공책에 옮겨 적게 하는 것으로도 벅차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아이가 또 온다. 재미없어서 안 온다고 할 것 같은데 글방 오는 날을 기다린다. 주님이 그러시는 게 분명하다. 혀가 짧아 말투도 어눌하다. 늘 곁에 앉히고 손이 많이 간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령이 가져다주시는 능력이어야 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 8:10).” 선생이 요즘 부쩍 전화를 한다. 내가 쓴 글씨를 보고 가독성을 운운하며 필체를 가꾸어 어찌 상품화하면 어떻겠냐는 소리다. 글씨는 자고로 서도(書道)라 하여 획과 음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이를 도에 비유하여 정신을 다스린다고 한다. 옳은 말이나, 나는 저가 안타깝다. 뭐랄까, 기껏 차려놓은 밥상 앞에서 맛있게 먹지를 못하고 그릇의 위치와 상의 크기와 찬들이 놓인 자리를 두고 자꾸 뭐라 하는 것 같으니!

 

중1 여자 아이 둘이 너무 민망할 정도로 옷을 입고 와서 다음에도 그리 하면 도로 돌려보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너무 짧은 핫팬츠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고, 쫙 붙는 레깅스에 배꼽티를 입었으니, 한 아이는 또 귀에다 치렁치렁 귀걸이를 걸고 둘 다 입술을 빨갛게 칠하였다. 죄다 어른 흉내다. 한 아이는 엄마가 전화를 하거나 카톡을 하면 모조리 씹는다.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으니 괜찮다는 소릴 한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잘못된 것일까? 잠언을 한 장 같이 읽고, 그 가운데서 한 구절을 공책에 옮겨 적게 한 후 자기 이야기로 연관 지어 글을 쓰게 한다. 내가 어찌할 수 없어 주님께 미룬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그러려면 주의 능력이 아니고는 어림없다. 내가 다 늙은 노모의 고집을 어찌 꺾겠나. 아이들의 옹고집을 무슨 수로 이기겠나. 글방은 좋은데 교회는 싫다는 데야. 글을 보고 글씨를 운운하며 가독성을 따지는 선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마치 내가 내 힘으로는 풀 수도 없는 문제들을 떠안고 씨름하는 것 같다. 실력도 안 되는데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을 맡기시는 것일까?

 

췌장암으로 항암치료 중인 나의 젊은 동기 목사의 사진이 올라왔다. 여름 감기로 폐렴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 갔다며 서로들 기도를 부탁하는 거였다. 줄줄이 아직 어린 세 아이를 둔 가장이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저의 사진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산다는 일, 이 넌더리나는 인생 과업을 두고 우리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정신 차려야 한다.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겔 33:4).” 무장해야 한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 그렇지 않으면 이 엄연하고 진중한 현실을 어찌 감당할 수가 없다. 다들 제 기준의 시간과 판단과 이치를 가지고 저리들 한눈을 팔고 사는 것이었으니, 언제든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떠나야 하는 것이 인생이었다.

 

단지 오늘을 사는 것으로 족한 인생이라면 누가 뭘 하든, 어찌 살다가든 그게 뭐 그리 대수이겠나? 한데 각각의 영광이 다른 것이어서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 그러니 지금은 그래도 언젠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오늘을 살며 두시는 이의 뜻을 따라 그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는 어림없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나이어린 꼬맹이도 자기주장이 강하여서 누구 말도 듣지 않는데 하물며, 선생이면. 팔순을 훌쩍 넘긴 노모이면. 저들을 휘두르는 세상의 온갖 기준과 가치와 즐거움에 대해서는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우울증으로 곡기를 끊다시피 한 마나님에 대해서는 그러려니 하면서도 칠순이 다 돼 동기동창모임의 회장을 맡았다며 구구절절 이를 돌보고 저를 챙겨야 한다는 소리에 나는 저를 보며 속상하였다. 다들 자기 멋에 겨워 사는 게 인생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몇인데 왜들 그럴까.

 

나는 주께 힘을 얻는다. 내 마음에 주의 길이 놓여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것으로 나의 공의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 이를 위하여는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3-4).”

 

그러할 때 가능한 일이었다. 주를 경외함이다. 그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들리는 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공의로, 정직으로, 겸손으로! 내 입에 두시는 막대기로 세상을 치고 그 힘으로 악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공의로 띠를 띠는 일이다. 성실로 몸의 띠를 삼는 일이다. 주를 바로 두려워할 줄 알 때 주께서 주시는 바른 평안을 사모할 수 있는 것이다. 난들 내가 나를 이길 수 없어서 말이다. 누구더라, 한참 어떤 일에 대하여 뭐라 하고 속상해하다가도 그게 나였고 그게 나여서 주 앞에 무릎 꿇는다.

 

누구 탓이 아니다. 저들만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성경을 쓴다. 글씨를 보며 그 의미를 음미한다. 내게 두시는 말씀을 가슴에 새긴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후 3:2).” 주가 나를 어찌 새겨 넣으셨던가.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 내가 저들에게 읽혀지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4).”

 

내게 두시는 오늘의 사명이었다. 누구는 젊은 나이에 사경을 헤매고 누구는 팔순이 넘어서도 한 푼 더 모으려고 여느 다단계자리를 전전긍긍하고, 누군 자신으로 인해 우울증이 더하는 마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 애경사를 챙기며 책임을 운운하고 있었으니. 참 다들 인생은 요지경이라.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5).” 오늘 말씀은 가만히 되뇌어 읽는 것으로 그 의미가 뚜렷하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8).”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이 단지 사느라 사는 데 전념하다 가는 인생이 전부이겠나? 이처럼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9).” 고작 한 생을 살면서 명분을 운운하고 보람을 찾는 위인들이 하물며 영생에 대하여는 어찌하려는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17).” 내가 주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18).” 그날이 올 것을 이제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다른 더 좋은 수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6).” 주가 담당하신다. 그러므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 주께 바란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11).”

 

곧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