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고린도후서 5:4-5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86:17
고통스러울 정도로 더운 날씨였다. 아이는 성경공부를 위해 시간에 맞춰서 왔다. 에어컨을 돌려도 창가 쪽 열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아이엄마는 2주간 필리핀으로 무슨 연수를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아이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끝나고 영화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너무 더워서 거기까지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아이는 서둘러 돌아갔다. 오후 몇 시에 엄마가 집을 나서는데 그 전에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피로와 불안에 힘든 표정이었다.
그런 아이의 상태를 서로는 염려하지만 모두는 다를 게 없었다. 저마다 자기 생각과 고집으로 산다. 아이를 돌려보내고 교회로 올라오자 옆 사무실 노인이 나와 있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며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마나님의 건강은 어떠신가 물었다.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데 솔직히 화도 좀 났다. 물론 당사자들이 더하겠지만, 너무 막연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주의 손길로 여기고 저들은 그저 우연한 일로 다룬다.
저마다의 고통이 육신의 장막일 거였다. 더위 때문인지 종일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저 다만 주의 긍휼하심을 바랄 따름이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4-5).” 오늘 말씀을 다시 음미해본다.
누가 말하길 아이 문제는 주께 맡기기로 했고 주의 뜻을 바란다는 말로 더할 수 없는 부분을 채웠다. 노인은 마나님의 상태를 팔자소관으로 미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치부하였다. 우리가 그 탄식을 벗고자 하는 데 대해 성경은 덧입고자 함을 일깨우고 있다. 우리가 주의 것임을 보증하는 일은 성령이시다. 하나님이 주시고 예수께서 받으라 명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아이와 같이 요한복음을 읽으며 서로 주목하였던 구절이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아이는 평강이 무엇인가 물었다. 나는 마음의 평안을 설명해주었다. 걱정과 탈이 없는 상태인데, 사람으로 사는 날 동안에 어찌 그럴 수 있겠나? 당시 제자들과 예수님의 사람들은 예수의 죽으심 앞에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 또한 사는 날 동안 어려움과 불안으로 시달릴 수밖에 없다. 육신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이 말이다. 그러는 중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주가 말씀하신다. 이는 환경이 좋아질 것이고 보다 나은 생활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성령을 받으라.’
이를 설명하기를 우리가 여기서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는데도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라고 하였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행하게 하시는 삶의 모양이다. 어렵고 힘든 이 육신의 장막을 홀연히 떠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으나 이는 주의 주권하심 아래 있는 것이고, 다만 그럼에도 덧입는 것이 성령이었다. 아이가 그저 갈 데가 없어서 오고, 할 게 없어서 성경공부도 하고, 말할 사람이 없어서 내게 말하는 것으로 치부하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걸 이제 나는 확신한다.
고통이 모두 주를 바라게 하지는 않는다. 어려우니까 주를 찾는 경우도 드물다. 그래서 저마다 여행을 떠나고,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그럴수록 ‘말씀 밖으로’ 눈길을 돌리고 그것으로 위로와 평안을 도모하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모른다. 나는 아이가 정신이 좀 모자라서 주께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또한 육신이 어려우니까 주를 더욱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럴 수 있게 하시는 이의 은총이라.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이와 같이 구하고 바랄 수 있는 게 성령의 능력이다. 모두가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는 있으나 이를 기다리고 위하여 모든 걸 맡기는 것은 아니다. 바라기는 여기서 바라고 위안은 다른 데서 얻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니, 주의 뜻을 바라며 아이가 낫기만을 위한다거나 어떤 악조건이 개선되어 조금은 살기 좋은 인생을 바라는 것이기도 하였으니.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더러는 그 일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 우리가 원하는 환경이 아니다. 그런 조건이 아니어서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또한 하나님의 뜻은 기쁘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때론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기쁠 수 없게 한다. 3년을 꼬박 동고동락하며 뜻을 같이 한다고 했는데 그처럼 허무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다. 우리의 생각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처럼 두통으로 일그러진 아침에도, 진통제를 먹었더니 속이 울렁거리는 가운데도 주일을 생각하고 예배를 떠올리며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염려하면서, 주가 함께 하시기를 바라고 구한다. 하나님은 뜻을 온전하게 이루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좋은 환경보다 안 좋은 환경이, 더 나은 결과보다 실패가, 어떤 고통이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는 데 더 유용한 것이라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
이와 같이 말씀 앞에 앉아 나는 이 장막의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주께서 오늘 하루, 이 주일을 거룩히 받아주시기를.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시 86:10).”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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