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전봉석 2018. 7. 28. 07:20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6-7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시편 85:10-11

 

 

 

내 마음에 비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증명된다. 이는 내 의지나 노력으로 아이를 대하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어서 단지 측은지심의 정도가 아니다. 안쓰러움으로 그치지 않는다. 만일 내게 능력이 있었다면 더욱 더 잘했을 것 같지만, 아내에게도 종종 이르기를 우리의 쪼들리는 형편이 또 궁색한 살림이 도리어 아이들을 더욱 위하고 사랑하게도 하는 것이다. 즉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만 바라게 한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는 오늘 말씀이 그 의미를 더한다. 내 안에 임재하시는 주의 은혜라. 곧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도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거였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도하심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이와 같은 절대적인 사실 앞에 나는 안도한다. 참 다행이다. 나란 사람의 수고와 노력에 의한 결실이 아닌 거여서 말이다.

 

신기하지? 에베소서는 위암으로 죽음을 맞이하던 이의 침대 맡에서 여러 날을 같이 읽어서 그런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 하는 말씀과 같이 더욱 분명하게 나를 붙들어 세우신다. 결국 이 보배는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일인지.

 

아이는 퇴근하고 글방으로 왔다. 길을 잃어 한 시간 거리를 두 시간이나 걸려서 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말을 하면서 자꾸 하던 말을 까먹고 스스로도 답답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천천히, 괜찮아 괜찮아, 나는 아이를 어르며 말을 하게 했다. 어디 저녁을 먹으러 식당을 찾아 헤매는 게 아까워서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아이는 자꾸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자기 때문에 일이 더 그릇될까봐 신경을 썼다. 가령 정신을 집중하고 어느 물건을 어디에 정리해야지, 하고 있는데 누가 물으면 들고 있던 것을 왜 들고 있었는지 순간 잊어버려서 다른 사람이 두 번 세 번 일 해야 하는 게 속상하다. 말인즉 그런 내용이었다. 이 말을 하고 싶은데 엉뚱한 단어와 생각이 서로 뒤섞여 본인도 답답해했다.

 

아이에게 너무 벅찬 일이 아닌가, 염려도 되었다. 잘해야 한다는 책임과 이번에는 잘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아이를 더 스트레스 받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엄마는 자기 일로 연수에 참석하기 위해 오늘 필리핀으로 2주간 출국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아이는 정신과 상담도 받아야 하고 취업을 위한 종합검진도 받아야 한다. 스케줄이 꼬인 것이다. 거기서 오는 짜증을 아이 앞에서 속상함으로 표출하고, 아이는 또 그런 엄마를 보면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미안하고 속상해 한다. 이 또한 내가 들은 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내가 나서서 무얼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나 또한 안타까움뿐이다. 한 사건이나 상황에는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뒤섞인다. 서로는 또 개별적으로 각각의 사연과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단순한 사건이라 해도 이를 명료하게 정의할 수 없다. 이 사람의 입장과 저 사람의 입장이 있고, 또한 저마다 얽힌 이야기와 이야기가 있고, 모든 이야기는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또 개체적인 것이어서 무엇도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다. 중3 아이가 이번에 쓰는 단편 소설을 읽고 그에 대해 설명하다 들려준 말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아무리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한다 해도 누구도 서로를 다 알 수는 없다. 잘 안다고 말할 수 없고, 그 일에 대해 단정 지을 수 없다. 이를 오늘 말씀은 이렇게 설명하는 듯하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곧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수건을 덮고 보는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도 그 정도다.

 

감히 내가 잘 안다고 말할 때 도리어 하나님을 축소하고 왜곡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래서 말씀이구나.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이는 계시의 언어여서 열어 보이시지 않으면 알 수도 없는 세계다. 그럼에도 내가 말씀을 상고해야 하는 까닭은 모든 일이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주께 바라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알 수 없다. 왜 저 아이를 내 곁에 붙이셨는지, 아이는 그 피로를 무릅쓰고 길을 헤매면서도 글방으로 와서 이런저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나는 무얼 들어야 하고 어떤 걸 알아야 하는지, 아이를 중심인물로 두고 그 주변에서 펼쳐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에 대하여 얼마씩 이해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지. 그저 안 됐다, 하고 안쓰러워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측은지심은 내가 갖는 동질감이고 긍휼함은 주가 두시는 마음이다. 내가 중3 아이를 이해하고 ‘다시 또’ 어르고 달래는 마음이 실은 내 것일 수 없다. 초딩 5학년 아이가 영악하기 그지없어 말을 지어낼 때 정나미 떨어지는 일을 내가 수습할 수 없다.

 

나는 그럴수록 나의 연약함을 본다. 하필 질그릇이다. 나 같은 사람이다. 왜 이 정도인데 주는 내게 저 아이들을 위하고 바라고 구하게 하시는가?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 그 이유가 말씀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말씀을 넘어간 마음은 모두 허사다. 도리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멀어질 뿐이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9).” 이는 공식과 같아서 아무리 복합한 구조의 이야기라 해도 그 이유는 하나였다. 이런저런 사정은 알겠으나 우선은 아이에게 너무 힘든 직장이다. 그리고 아이엄마의 자기 궁리도 비록 본인도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점은 감안하더라도 꼭 그럴 거까지 있나싶다. 그리고 기타 등등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각기 저마다의 이해와 해석과 그로 인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각자의 판단과 기준을 붙들고 사는 셈이니, 이는 ‘방탕에 방임하여, 욕심으로 행하’는 일이 된다. 저마다 아니라고 항변하겠으나 욕심으로 행하는 일 맞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 우리가 배운 바,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고, 주께서 주도하신다는 것이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21).” 그러니까 아등바등 우리가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허점투성이라. 그 바쁜 일상 때문에 교회를 등한히 하고, 기도에 게으르게 되며, 말씀을 상고할 수 없고, 깊은 묵상은 점점 묘연하여져서 기어이 말씀 밖으로 떠밀려 나가게 되는 것이다.

 

아이는 어떤 의도에선지 기도하고 있어요, 화장실에서도 기도했어요, 하며 자기 말에 동조하는 내게 부연하듯 강조하였다. 그런 아이에게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하자고 했다. 어쨌든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게 되었으니 그리 시간을 맞춰보자고 말이다. 아이는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졌다. 토요일에는 엄마도 쉬고 형도 종종 집에 내려오고 할머니 댁에도 가야하고 교회 형들과 축구도 차야 하는데. 쭈뼛거리는 아이에게 그건 그때 가서 그때마다 시간을 조종하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아이는 네! 좋아요, 목사님! 하고 대답한다.

 

비록 또 까먹는다 해도, 또는 어떤 일에 치여 밀리고 뒤로 쳐져 등한히 되곤 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이와 같은 고백을 기뻐하시겠구나, 생각하였다. 내가 주께 고백하는 한 마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를 나는 감당할 수 없으나 ‘이를 알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 곧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에 따른 증명이 나의 나 됨에도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6-7).”

 

나는 아이를 움직일 수 없다. 그 마음을 붙들 수도 없다. 저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도 영향도 끼칠 수 없다. 다들 저마다의 사연과 사연을 이유와 이유를 가지고 씨름하는 세상에서 결국 내가 붙들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말씀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 85:10-11).” 이를 열어 보여 알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묵묵히 주시는 바 그 생을 다하는 게 주께 영광이다. 이로써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12).”

 

이에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