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2:9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편 93:5
도리어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할 때 나타나는 힘이 있다. 그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끄심에 대한 것으로, 더는 나의 의견을 말하지 않게 된다. 현실적으로 타당한가, 하는 문제도 내가 판단할 게 아닌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묾을 느낀다. 온화해진다.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하며 온유함으로 긍휼하게 된다. 이 또한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끄시는 데 따른 순종을 배울 따름이다.
가령, 어제 차를 한 대 계약하였다. 나는 내 능력껏 경차를 찾았는데 아내와 딸애가 매장에 와서 결정을 할 때 그보다 나은 것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우선은 혜택이 더 많았다. 딸애와 아들애가 같이 탈 것을 고려해야 했고, 그 지분을 가져갔다. 손위 처남 형님이 보태고 하여 어쩌다 과분한 것이 생겼다. 나야말로 그리 된 것에 대해 잠자코 있었을 따름이다. 어찌어찌하여 그리 되어지는 일에 대하여는 뭐라 더 할 말이 없다. 그저 감사를 배운다. 신기한 노릇이다. 가만 보면 내가 하는 게 없다.
나는 다만 그리 되는 일에서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의뢰할 뿐이다. 차 한 대 새로 생기고 하는 일에서도 내 판단이나 기준을 미루면서 주의 인도하심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구나.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내게 또한 이 좋은 걸 허락하시는 덴 그 쓸모가 있을 거였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 다만 주의 뜻을 바라는 것.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은 것이니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데 놀란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가만있으면 주가 알아서 하신다. 주만 바라면 되는 일이 되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더는 세상에 종노릇하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 무엇이 되었든 의연하게 주를 바라게 하시려는 일이다. 아이에 대한 마음도, 어떤 근심도 또는 어려움도 실은 내가 애써 구하는 게 아니었다. 미리 예비하신 바, 그 모든 일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일. 조금은 유치하지만 이와 같이 보니 이제는 자동차 한 대를 갖게 하시는 데도 주의 손길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때를 따라 돕는 이의 손길이라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늘 보면 내게 너무 과분하다. 전에는 마땅히 받아야 할 정도로 여겼던 일이 이제는 다 은혜라. 전에는 그래서 기쁨을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송구하여서 감사할 따름이다. 긍휼하심이란 내 분수에 넘치는 은총이다. 자격이 안 되는 자에게 그리 여겨주심으로 주 앞에 나아올 수 있게 하심이다.
신기하지?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주가 함께 하신다는 게 단지 느낌의 문제나 마음의 문제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실제의 삶에서 그 현장 곳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들 가운데서 빚어지는 역사였다.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렇지. 그러하여서 나로 하여금 살아가는 동안에 주를 더욱 의뢰하게 하시는 거였다.
더욱이 하는 것도 없이 받기만 하는 사람이라 그 은총은 매번 송구할 따름인 것이다. 나의 발언권이 넘어간다. 내 것으로 여겼던 자유의지가 실은 주께 더할 때 더욱 풍성하였다. 그렇구나. 그래서 달라진 것은 전혀 다른 새 생명으로 사는 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바라고 구하는 의지가 다름으로 펼쳐지는 세계도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7:4).” 그게 무얼까? 먼저는 감사를 하게 하시고, 주의 뜻을 살피게 하시며, 나의 의중에 있던 불안을 제하신다. 남을 대하는 마음이 내 것이 아니고, 두시는 생각으로 주께 아뢰어 기도하게 하신다. 결국 율법의 요구가 삶에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4).” 내 의지가 아니었다. 어떤 결단이나 결행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주가 하시는 대로 맡김을 통해 가능해지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한 게 없다. 이를 알면 알수록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19-21).”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더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아, 그래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시는 말씀 앞에 감읍할 따름이다. 이를 말씀으로 받고 생각으로 집중하여,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그렇지! 그리 되게 하시는 일이 주의 것이었다. 주만 바라고 의지하는 것으로.
이래저래 염려가 먼저 앞서는 것은 사람으로 사는 동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성령이 내주하심이란 그리 알고 의식하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일이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내 안을 채우고 있는 부정적인 마음을 몰아내신다. 염려하고 근심하는 일도 멈추게 하신다. 그것까지도 내가 할 수 없다는 걸 주께 인정함으로 얻어지는 결과였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믿으니 따를 때이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그게 다 주의 간구하심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6).” 그래서 주가 내 속에 계시다는 건 실제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
남들이 들으면 고작 자동차 한 대 새로 구입하면서 뭐 이렇게까지 체험하고 표현하는가 하겠으나, 그러게 말이다. 그 별 것도 아닌 일에서도 주가 이루시는 손길을 느끼며 산다니 이게 곧 은총이지 않겠나? 내 주제에 어찌! 하는 마음이 그저 황송한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너머에서 주가 이끄시고 관여하시는 모든 주관을 인정하는 일이 되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막연하여 저 멀리 보이는 환상적인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다. 아주 지독한 실제였다. 그 가운데서 주가 행하시는 일들이었다.
사나 죽으나! 어찌 이렇게 표현하는지 알 것 같다. 죽이셔도 좋다니. 그 인자하심이 자기 생명보다 귀하다니. 도와주지 않으신다 해도 하나님을 믿는다니. 도대체 그러한 마음이 어떤 것일까 궁금했는데, 내 것도 그러하지 않은가! 이 땅에서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도 벌써 저 영광의 나라에 사는 것처럼 희미하나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하여! 그렇지. 주의 섭리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은 것이다. 스미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처럼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두려워하면서 그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일이었다. 문득문득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실질적이라는 데 놀랍다.
아, 그러니 오늘 말씀! 그 은혜가 내게 족하였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게 어떤 어려움이어서 좋을 리 없는데 좋은 것이다. 고통스러워서 몸서리쳐지는 일인데도 싫지는 않은 것이다. 족하다. 족한 것이다. 나의 약함이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으로, 그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일이었다.
아,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시 9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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